캘리버 뷰어 프로그램 소개

캘리버 뷰어 프로그램 소개

캘리버 라고 하는 전자책 뷰어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PC에서는 설치가 간편합니다. 아이폰에서는 앱을 몇 달러 주고 사야 하더군요. 안드로이드폰에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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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 『사상과 현실』 중요 문장 소개

박치우 『사상과 현실』 중요 문장 소개

박치우

『사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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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대 철학과에서 천재로 이름났던 박치우가 해방공간에서 현대일보 발행인으로서 활약하다가 펴낸 민족국가 수립 이론서이자 사회변혁 이론서 ‘사상과 현실’의 명문장을 소개한다.

『사상과 현실』

입문 환영합니다

“철학은 우선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철학은 자기 자신만을 먹고 사는 그렇게 청백한 그렇게 초연한 학문이 아니라, 결국은 현실에 관한 하나의 사회적인 의식 즉 ‘이데올로기’의 하나다.”

– 11쪽 <철학의 당파성> 중에서 –

“생계가 직업의 중요한 요소임은 물론이나 그러나 생계가 직업의 유일의 요소는 아닐 것이다. 직업은 본래 그것을 의미할 독일어 Beruf가 Berufung 즉 신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다는 이를테면 ‘소명(召命)’의 뜻을 가진 것이어서 그 자신에 있어 ‘천직(天職)’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천직이란 물을 것도 없이 특정의 개인이 거기에 종사할 가장 적절탁월한 천품(天稟)을 타고났고 또 그러하기 때문에 그 일에 종사함으로 말미암아 개인 자신에 있어서나 사태 자체에 있어서나 최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직업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생계와 소명, 이 두 가지 요소가 완전히 하나가 될 때에 한 개의 직업은 비로소 이상적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인데 불행히 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소명은 점차로 뒷전으로 밀려나가고 생계만이 홀로 남아 있게 된 관계로 직업은 단순한 한 개 호구의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떨어지고만 것이다. R군의 비극은 그 좋은 예의 하나이다. 학자로서 일생을 보내는 것이 하늘이 자기에게 내린 사명이라고 믿으면서도 호구 때문에 그는 악기상을 직업으로 택하였다. 소명과 생계의 격렬한 싸움을 견디어 가면서 소명은 소명, 생계는 생계로서 따로 세워 보려던 것이 끝끝내 실패를 보고만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가 보더라도 R군의 악기상은 천직이 아니었다. ‘그것이 목적인 직업’이 아니라 ‘그것이 수단인 직업’에 불과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처리해야 옳을까. “

– 32-33쪽 <지식인과 직업> 중에서 –

“지금까지의 조선의 현상(現狀)은 ‘아카데미즘’은 ‘아카데미즘’대로 ‘저널리즘’은 ‘저널리즘’대로 마치 두 사람의 상관없는 이방인처럼 너무나 몰교섭적인 벌어진 두 길을 걸어왔던 것만 같다. 하지만은 이래서 옳을까? 이래서도 좋을까? 두 개의 호(弧)는 기회를 다투어 서로가 되도록은 덮쳐야 하며 덮치는 가운데서 서로가 실상은 보다 풍성해지는 것이며 보다 믿음직한 성과가 기약될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이 저서에서 되도록은 이 양자의 괴리에서 오는 결함과 미흡의 보충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해 본 것이다. “

– 서문에서 –

“긍지(衿持)는 모름지기 버릴 때다. 과거에 대한 자랑보다도 미래를 향한 창조적인 결의를, 감정보다도 이지를, ‘센티멘트’보다도 ‘라티오’를 한 걸음 먼저 갖추어야 할 때가 아닐까? 진실로 이것은 고문화(古文化)의 재음미(再吟味), 문화유산의 검택(檢擇)에 있어 언제나 먼저 냉정히 반성해야만 하는 가장 요긴한 문제인 것이다. 만약 이 같은 반성이 앞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벌써 그 소위 ‘재음미’와 ‘검택’이란 자(者)에 기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거기서는 단순한 회고적인 골동취미(骨董趣味)나 그렇지 않으면 소박한 선양주의(宣揚主義)적인 상고(尙古) 운동·복고 운동 이외의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선양을 위한 파렴치한 왜곡과 그리고는 오직 감상의 소장(消長)만이 남아 있을 따름일 것이다. 왜곡만이 소득일 터일 선양주의적인 상고 운동, 복고 운동 그리고는 회고적인 골동취미. 그러나 나는 왜 하필 문제를 이렇게 제기하는 것일까.”

38-39쪽 <고문화 재음미의 현대적 의의> 중에서

“청림교(靑林敎))의 불쾌한 기억이 사라지기도 전에 육만 명의 피해 기록을 낸 보천교(普天敎) 사건이 한동안 세상을 소란케 하더니 1년도 채 못 되어 다음에는 또 그 무시무시한 백백교(白白敎))의 대살육이다. 참으로 ‘사교화시대(邪敎禍時代)’인 감(感)조차 없지 않다. 더구나 그렇게 유치하고도 파렴치한 종교상업주의의 발호가 날이 가면 갈수록 줄어지기는 고사하고 이미 살해고(殺害高)의 그래프가 명시한 듯이 청림교, 보천교, 백백교, 이렇게 대를 거듭할수록 도리어 늘어만 가고 있는 형편이니 한심한 일이다. 보통 같으면 날이 가면 갈수록 교육도 보급되며 ‘민도(民度)’도 높아져서 미신이라든지 사교의 폐단 같은 것은 당연히 줄어가야만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교사(邪敎史)는 웬 심인지 도리어 번영의 기록만을 더해가는 현상이니 이거야말로 괴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러니만치 또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복잡한 사정이라기보다는 비밀이 숨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캐어 볼 작정이나 여하튼 이 같은 반갑지 않은 경향이 날로 더하여 가고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보천교와 백백교, 이 양교(兩敎)의 손에서 지어진 두 개의 피해기록을 비교해 볼 때 더 한층 명료해지는 것이다. 보천교에 있어서는 비록 그것이 문명과 여론을 비웃는 듯이 몇 해를 두고 거의 공공연하게 사재편취(私財騙取) 혹세무민(惑世誣民) 등 갖은 악덕(惡德)을 쌓아 오기는 했어도 그래도 백백교에서 보는 것 같은 그러한 잔인무도한 살육까지는 아직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  45-46쪽 <사교의 발호와 종교상업주의> 중에서 –

“초기 신흥 시민층은 구세력 중세적 봉건의 부자연한 억압으로부터 자신[시민인으로서의 자신]을 완전히 해방시키기 위하여서는 이 난업(難業)을 수행할 굳세고도 새로운 인간 ‘타잎’의 창조가 무엇보다도 필요하였던 것이니 이러한 인간 타잎의 창조라는 시민인의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동원된 관념력(觀念力)이 곧 당시로 보면 가장 진보적인 지식인의 그것이었던 것이며, 이러한 지식인의 운동의 총괄적 명명(命名)이 다름 아닌 ‘르네상스’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문예정치, 자연과학, 종교 등 온갖 문화 부문에 점차로 맹렬한 기세로 이 운동이 퍼져 든 것은 세인이 주지하는 바이나 이러한 각 부문이 언뜻 보면 상호 무관계한 듯이 보이면서도 시민적인 인간의 타잎의 창조라는 점에서는 완전히 일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창조가 본래 그러한 것과 같이 ‘무(無)’에서 돌연히 튀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니 여기서 그들은 이러한 타잎의 선례를 역사에서, 자연 그들과 친한 역사에서 찾게 되었던 것이며 이 행운의 제비에 뽑힌 자가 곧 자유롭고 명랑한 저 고희랍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실상인즉 ‘희랍에로’라는 당시의 표어는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설사 ‘요순(堯舜)에로!’라든지 ‘단군(檀君)에로!’라고 해도 본질적 의미에서는 전연 무관계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참된 의도는 설사 무의식적이었다 치더라도 다만 중세적 체제를 파괴함에 충분한 ‘힘’을 가진 그러한 ‘타잎’의 인간이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결국 신흥시민층의 본래적인 ‘요구’에 응할 수 있는 ‘타잎’이면 그만이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봄으로써만 우리는 시민 해방 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라는 한 개의 문화 운동을 그의 역사·사회|64|적 성격에서 완전히 파악할 수가 있음과 동시에 그들의 소위 ‘희랍에로!’라는 표어는 단순히 한 개의 ‘슬로건’에 불과한 전술적 의미 이외의 아무러한 의미도 가짐이 없다는 사실을 밝힐88)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대에로! 뒤에로!라고 외치면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손으로 지은 증기선과 화차(火車)에 몸을 실은 채 끝없이 앞으로 앞으로 달음질치고 있었던 것이다. 부흥은 복귀가 아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르네상스’를 ‘복귀로서의 발견’이란 의미에서 사용함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알아야 한다.”

 

– 63쪽 <현대철학과 ‘인간’ 문제
-특히 ‘르네상스’와의 관련에서-> 중에서 –

“그러나 전환기에는 언제나 인간의 문제가 새로운 반성을 야기한다고는 하나 이러한 반성의 전부가 모조리 구인간(舊人間) ‘타잎’의 ‘질적 지양(止揚)’을 목적 삼는 그러한 근본적인 반성인 것은 아니|70|다. 질적 지양의 방법에 의한 근본적인 구제를 앞두고 거기에는 반드시 허다한 양적 개량(改良)의 시행(試行)이 선행(先行)하는 법이다. 이러한 ‘선행’의 한 개 기도가 곧 소위 실존철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하이데거’, ‘야스퍼스’ 등등의 인간관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지만은 그러나 실존철학이 발견한 인간은 또한 그것이 본래 질적 지양의 방법에 의하여 찾은 인간이 아니었던 이상 새 시대의 인간은 못 된다는 것을 나는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실존철학은 단지 낡은 순수 인간에 새로운 옷[衣]을 입혔음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대체 왜 일부러 ‘새로운 옷’이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일까?”

– 68쪽  <현대철학과 ‘인간’ 문제
-특히 ‘르네상스’와의 관련에서-> 중에서 –

 

“해답의 범람이 여기서도 화(禍)였던 것이다. 이 같은 범람은 그러나 ‘헤로도토스’ 이래로 우리는 이미 너무나 다수|76|인 학자들의 세대관에서 충분 이상의 경험에 시달려 온 터이기는 하지만은, 신분 이론과 함께 최근에 와서의 갑작스러운 세대 이론의 범람에는 새삼스러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혹은 정세의 역전에 기인된 계급이론 진영의 퇴세(退勢)를 엿보았었음일까? 까놓고 보면 계급 대신에 세대라는 그럴 법한 것을 내세우고 어물어물 넘겨 버리려는 심보에서임이 분명하지만은 어떻든 역사나 사회에 관한 이론은 더 말할 것 없고 문학 음악 등의 예술 부문을 위시해서 교육이론, 특히 청년론을 위주로 한 교육이론에 이르기까지 세대주의의 제 이론이 맹렬한 기세로 퍼지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75쪽 <세대사관 비판> 중에서 –

 

“그렇지만은 우리는 여기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한다. 세대가 역사 성립에 빼지 못할 토대가 된다고 해서, 곧 역사를 세대 본위의 입장에서 재단해도 좋다는 이유는 나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인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러나 인간은 세대 없이는 연속될 수 없으니 세대는 모름지기 역사의 중심에 앉아야만 된다는 말은, 동일한 논법으로, 역사는 인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러나 인간은 또한 ‘공기’ 없이는 생존할 수 없으니까 공기를 역사의 중심에다 모셔야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넌센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생사(生死), 따라서 세대의 교체라는 생물학적인 ‘리듬’이 역사의 토대 가 된다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역사가 도출된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만하임’의 말과 같이 “durch etwas hundiert sein”115)이란 말은 “aus ihm ableitbar sein”116)이라든가 “in ihm enthalten sein”117)이라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주5) 세대사관은 진실로 이 점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며 이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넌센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혼동-치명적 혼동-은 그들의 시간관, 계급관에 이르러서 한결 더 노골화되는 것이지만…….”

 

115) 원문에는 hundiert로 되어 있는데, fundiert의 오자이다. 이 구절을 번역하면 “어떤 것이 토대가 되다”나 “어떤 것에 의해 기초지워져 있다”로 번역할 수 있다.

116) “그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117) “그것 속에 포함되어 있다.”

118) 박치우는 핀델이라고 표기했는데, 그 당시는 r과 l을 동일하게 발음한 것 같다. 그래서 편집자는 핀델을 핀더로 고쳤음. 

– 98쪽 <세대사관 비판> 중에서 –

영 제국(英帝國)에서의 인도인이나 미국에서의 흑인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무산근로대중의 이익과는 관계없이 오로지 돈을 중심으로 운전되고 있는, 실질적으로는 ‘금(金)’주주의에 불과한 민주주의도 있는 것이며 한편 또 이것들과는 전연 반대로 도리어 노동자와 농민만의 이익을 위해서 운영되는 노동자 농민 독재의 소련의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있는 것이다. 한데 역사적으로 주체와 형식에 있어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로 구별되는 것이지만은 여기서 우리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조선 현황과 대비해서 제기되고 있는 소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문제이|106|다. 이것을 특히 위에서 이야기해 온 전체주의와 겨누어 가면서 그 기본논리를 해명해 보기로 하자.

 

 

(중략)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이 같은 박론(駁論)을 물리치기 위해서 원칙적으로 인간의 평등, 인간의 1대1(一對一)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며 또 이것을 그럴 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철학에다 원병(援兵)을 청하게 된다. 전체주의가 그리했듯이 민주주의 역(亦) 철학에서 여러 가지 이론적 무기를 빌려 오는 것이다. 이 빌려 오는 무기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형성하는 것이 [논리라는 점에서만 한(限)하고 본다면] 전체주의가 유기체설을 채용하는 데 대해서 민주주의는 형식논리를 채용하는 것이다. 하다면 형식논리는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변호의 역할을 맡아 볼 수가 있으며 또 맡아 보고 있는가?

(중략)

 

형식논리는 한 말로 말하면 현실존재의 논리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떠난 일종의 비감각적|108|인 일반자, 즉 이념존재의 논리다. 이 같은 존재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면 사유 형식의 학으로서의 형식논리는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리는 자신을 사유의 형식의 학으로서 성립시키기 위한 기본 요구로서 모순율과 동일률이라는 엄격한 공리의 승인을 전제로 한다.

 

(중략)

 

한데 이 같은 존재로서의 ‘개인’은 그것이 이처럼 최종의 단위인 동시에 궁극 존재로서의 독자자라면 그것은 자신의 원인을 자기 이외(以外)에서 가져올 수는 없을 것이며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의 원인을 타자에서 빌려 오는 존재자는 참된 의미의 독자자, 궁극 존재일 수는 없기 때문에] 따라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원인을 자기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존재 즉 자인자(自因者)134)일 것이며 ‘타유자(他由者)’135)가 아니라 ‘자유자(自由者)’136)일 수밖에도 없는 것이어서 사전에 피차간의 충분한 자발적인 응낙이 없는 한 여하한 타자에 의해서도 제약 구속을 받지 않는 그러한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면 아니 되게 된다. 진실로 시민적 자유주의의 배후에는 이 같은 형식논리적인 ‘개인’의 존재가 불가결의 것으로서 엄존해 있는 것이다.

 

(중략)

 

한편 또 민주주의의 형식논리는 과연 어떨까? 충분할까? 완전|111|할까? 간단히 몇 마디 적는다면, 첫째로 형식논리라는 것은 원래가 현실존재의 논리가 아니라 이념존재의 논리에 불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가장 현실적인 존재인 인간의 문제에다 이식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은 될는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이데아’138)나 단자[모나드]139)나 ‘아톰’이나 ‘인디비두움’은 결단코 아니다. 인종이나 민족이나 계급과는 아무러한 상관도 없는 무색투명한 한 알 한 알의 개인이라는 것은 실지에 있어 있을 수가 없다. 이런 개인이 있다는 것은 한 개의 추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사유의 형식의 학으로서는 형식논리학은 훌륭하다. 그러나 형식논리가 만약에 인간의 행동 내지 사회적 실천의 문제 더구나 역사의 문제에 용훼(容喙)140)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월경141)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실존재로서의 인간의 행동과 역사를 옳게 취급할 수 있는 논리는 현실존재의 논리로서의 변증법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역사가, 아니 민주주의의 역사부터가 벌써 이 말의 정당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영국의 민주주의는 절대다수인 3억의 인도인에게는 1대1을 적용하여서는 아니 되며 미국의 1대1은 아직도 흑인에까지는|112| 미치지 못하고 있다. 비단 흑인만이 아니라 같은 백인이라 해도 참된 1대1은 벌써 바랄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돈의 1대1은 있어도 사람의 1대1은 없다. 주식회사는 여기에 대한 가장 좋은 표본이 될 것이다. 주주의 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의 수에 의해서 주식회사는 운영된다. 자본주의 국가의 민주주의는 궁국에 가서는 이 같은 주식회사와 다를 배 없다. 민주주의는 이제는 벌써 민주주의로부터 ‘금(金)’주주의로 삐뚤어져 가고 만 것이다. 만약에 여기에 초기 민주주의가 주장한 저 형식논리인 제 요구를 그대로 실천한다면 오늘의 민주주의는 당장에 파산을 당하고 말게 될 것은 명약관화다. 인간동등, 1대1이 실현되었다가는 큰 일일 것이다. 일찍이 시민은 다수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시민은, 부르주아지는 벌써 다수자가 아니라 비만한 소수자로 떨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소수 봉건자를 타도하고 세계사의 빛나는 무대 위에 올라섰던 시민계급은 지금은 그 자신이 소수자로 전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다수자에 의한 결정적인 위협 앞에 떨고 있지 않으면 아니 되게끔 되어 버린 것이다. 진실로 이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변증법이 있을 뿐이며 또 이 과정 자체가 곧 변증법이기도 한 것이다. 섣불리 1대1(一對一)에서 1대1은 시민을 위하는 것으로부터 시민을 망치는 자기모순적인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시민적 1대1’에 대한 변증법적 해명인 것이며 이 같은 과정 그것이 또한 기실(其實)142)은 시민적 1대1의 변증법이기도 한 것이다.

 

– 제2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신생 조선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중에서

형식논리적 1대1은, 형식논리적 공평은 그러므로 공평의 ‘픽션’155)[허구]일 수는 있어도 공평의 현실일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공평이 아니라, 공평의 ‘픽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공평, 현실로서의 공평, 현실적인 1대1은 그러나 어디서 구해야 할 것일까?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 사실이 아니냐? 1대1은 말뿐이고 어디 진정한 1대1이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 현실적인 공평이란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아니 된다든지 또 있을 수 없다는 것의 이유는 못 된다. 있을 수만 있다면 있어서 무방한 것이다. 하다면 그것은 어떠한 공평이어야만 될 것일까? 그것은 어떤 공평일까? 능력에 의해서|128| 노동하며 노동에 의해서 분배하는 일, 이것이 ‘위선은’156) 그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능력에 의해서 노동을 시켜 주고 또 그 노동에 의해서 분배를 시켜 주는 데 불평이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불평을 중얼거릴 인간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있다면 그것은 욕심쟁이다. 욕심쟁이에게까지 만족을 줄 공평의 ‘스톡’은 없다. 노동에 의한 생활재의 생산이 없어도 인류는 넉넉히 살아갈 수만 있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하는 수 없다. 따라서 이렇게 되는 때의 1대1만이 ‘픽션’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1대1이며 비로소 명실상부한 1대1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지는 사태가 벌써 형식논리의 영역을 넘어가면서 있을 때에만157) 가능한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이 점은 특히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야만, 형식논리를 기초 원리로 하는 시민사회가 거꾸러질 때에만 기대할 수 있는 그러한 공평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민사회는 적어도 능력에 의해서 노동을 시켜 주며 노동에 의해서만 분배를 하여 주는 그러한 사회는 아닌 때문이다.

– <1대1과 형식논리> 중에서 –

민족이 문화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민족을 위해서 있다는 것은 한 개의 민족이 자신의 생존과 발전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순시(瞬時)도 잊어서는 아니 될 간명중대한 진리다. 높고도 아무리 아름다운 문화라 해도 그것이 한 민족의 세계사적 발전에 도움이 못 되고 도리어 이것을 저지(沮止)161)하는 질곡으로 화하게 되고 마는 한 문화는 남아도 민족은 망한다. 비단 ‘마야’나 ‘잉카’나 ‘쿠메르’의 경우를 운위할 것이 아니라 문화사 상으로 본다면 확실히 선진임에도 불구하고 근대문화 좀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 과학문명의 섭취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보잘것없는 경지에 떨어지고만 아세아의 제(諸) 민족의 오늘이 무엇보다도 웅변적인 좋은 예다.

이 같은 전락을 자위하는 수단으로 동양문화는 정신문화고 서양문화는 물질문명 기계문명이니 하면서 억지로 문화와 문명을 구별해 가면서까지 변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자아 기만이다.|132| 여기 다시 박차를 가한 것이 일제(日帝)162)의 음흉한 인종관일 것이다. 우리를 때려 부수고 우리를 약탈한 도구로 사용된 그들의 비행기나 기관총은 동양의 ‘정신문화’가 아니라, 기실은 서양 물질문명, 아니 정확히는 자본주의 과학문명에서 배워온 것 중의 하나인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는 일이다. 하거늘 그들은 의례히 문화라면 동양문화니, 아니 백인문명이니, 황인문화니 하며 문화가 마치 인종의 차이 때문으로 그처럼 차이 현격이 생긴 듯이나 떠든다는 것은 확실히 한 개의 음모다. 그들은 이렇게 가르쳐 감으로써 한편으로는 그 소위 서양문명이란 자를 슬금슬금 수입하다가는 저들로서는 절실히 필요한 압박과 침략의 도구, 가령 소총·기관총·군함·비행기 등속은 자꾸만 만들어 가는 한편, 우리나 또는 그들 자신의 피압박 대중에게는 소리를 높여서 신도니 황도니 팔굉일우니 하는, 근대정신과는 얼토당토않은 원초적·샤만적·국수당적인 미신이나 그런 것들을 지켜 줄 것을 강요해 온 것이다. 또 알고 보면 봉건적인 굴복과 인종(忍從)밖에는 더 안 되는 봉건 도덕적인 노예적인 것을 이것이야말로 서양인에게는 절대로 없는 동양 고유의 미풍이라고 해 가면서 ‘동양 도덕’, ‘동양 정신’이라는 미명하에 극력 칭송·권장·강요함으로써 압제에 의한 예속의 영원화를 기도해 왔던 것이다. 이 같은 음흉한 기만은 비단 우리네 조선인에게만 한했던 것은 아니고 중국 침략·태국 침략·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침략에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수행되었었다는 것은 지금은 한 개의 공연한 비밀이지만은 그들 일본인 자체에 대해서도 지배 특권 전제 제도의 확보를 위해서는 별도리가 없어 비교적 교양이 낮고 마음씨가|133| 단순한 무수한 피압박 근로대중들은 지배자의 이 같은 속임수에 그대로 넘어가서 누구를 위해서인 줄도 알 수 없는 침략 전쟁에 귀중한 땀과 피와 목숨까지도 알뜰히 제물로서 바쳐 온 것이다. 제국주의라 아무리 자국민, 동포라 해도 압제와 착취에 들어서서는 별수가 없는 것이다. 신생 조선도 자칫하다가는 이 일제(日帝)가 밟던 전철을 되풀이할 위험이 결단코 없지 않은 것이다. 세계사의 면에서 보지를 않고 그저 덮어놓고 이것이야말로 ‘동양적’, 이것이야말로 ‘조선적’ 운운만 하다가는 첫째 세계사적 수준에서 영영 뒤떨어져 버릴 위험성이 다분히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시대착오적인 완미한 국수주의적인 언동이 전제주의자나 신파쇼분자들에게 이용되는 날이면 봉건적인 것을 일소(一掃)하려는 민주 조선의 사회 해방은 영영 바랄 수가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대저 전제주의자, 더구나 조건이 나쁘기로는 이미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경우에서 충분히 보듯이 개명 (開明)한 전제주의자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가령 무기를 비롯한 물질적인 면에서는 되도록 근대를 확보하되 정신적인 면에서만은 어디까지든지 야만·미개·원시에다 인민을 얽매여 두려는 것이 인민 기만에 있어서의 그들의 상투적인 전략인 것이다. 이 같은 전략이 결국에 가서는 실패하고야 만다는 것은 오늘 이들 파시스트들의 말로가 무엇보다도 그 증거거니와 무릇 문명과 미개, 현대와 원시가 무리 없이 동서(同棲)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 <민족과 문화> 중에서 –

 

봉건사회에 비한다면 시민사회는 확실히 신분적인 격조를 광범하게 타파해버린 사회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시민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본이 유일의 저울인 계급제 사회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신분은 타파되었으나 유산과 무산이라는 새로운 날카로운 범주로 분열된 사회가 시민사회다. 문화공동체의 넓이는 확실히 확대된 것이 사실이기는 해도 [그만큼 확대되었기 때문에 민족국가가 탄생된 것이지만] 귀족 대신에 새로 등장해서 중심을 차지하고 앉은 자는 실상은 시민이며 일찍이 시민도 그 일원이었던 하층민이 아|144|직도 다대수175)를 점령하고 있고 노동자와 농민 등 무산대중은 경제적 구속 때문으로 해서 이 새로운 문화공동체에 동격적인 일원으로서 참가할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이 이러한 한 시민사회적 국민문화공동체 역(亦) 아직도 몹시 불완전한 채로 남아 있다고 볼 수밖에는 없으며 이러한 한 문화공동체는 이질적인 호상 분열된 두 개의 문화공동체의 형태로 갈라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공동체와 민족의 우리가 위에서 누차 지적해 온 불가분적 관계에 상도한다면 이 같은 상태를 그대로 남겨둔 채로 참된 의미의 민족의 통일을 바란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기대하기가 대단히 곤란한, 그 의미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의 경우는 한결 더 복잡하고 한결 더 난사(難事)일 것은 현재 조선이 처해 있는 역사적 단계로 보아서 오히려 당연 이상의 당연일 것이다. 자본세력은 고사하고 봉건세력이 아직도 뿌리를 그대로 박고 있다는 것이 오늘의 조선의 실정이다. 그러므로 통일 조선의 민족문화 건설이라는 이 중차대한 책임을 떠맡고 나와 선 문화종사자들의 앞길에는 진실로 상상 이상의 고난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단코 용이한 과제가 아니며 그러나 기필코 수행해야만 될 그러한 과제일 것이다. 민족문화를 건설하려면 전 민족을 포옹할 수 있는 문화공동체를, 그러한 문화공동체만을 만들어 내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공동체가 완성될 때에만 조선인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인종이나|145| 단순히 정치학적 명칭인 국민의 이름에서가 아니라 참으로 비로소 민족으로서의 이름 밑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상전과 노예의 관계에서는 상전의식이나 노예의식은 있을 수 있어도 참된 순수무구한 ‘동포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계급적으로 엄격한 문화적 국경을 고수하면서 참된 민족적 공감을 일거에 무조건적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너무나177) 낙천적인 너무나 안이한 주문이 아니면 아니 될 것이다.

– <민족문화 건설과 세계관>  중에서 –

 

신비주의의 배후에는 언제나 이 같은 비합리적인 논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어서 파시즘이 등을 대고 있는 논리 역시 언제나 일종의 이 같은 비합리적인 논리라는 것을 우리는 명기(銘記)할 필요가 있다. ‘피’나 ‘흙’의 논리야말로 그 가장 현저한 자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동포라면 반갑고 고국이라면 그리운가. 동포이기 때문에 반갑고 고국이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다. 그 뿐이다. 이 이상 설명해 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이것들은 확실히 보통논리, 합리적인 논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요소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나치스 철학이 언제나 ‘피’와 ‘흙’의 원리를 내세우게 되는 것은 이렇게 보아 오면 결코 이유 없는 일은 아니다. 이지(理知)는 여기서는 절대로 금물이다. 단도직입으로 감정에, 민족감정에 호소하고 마는 것이 언제나 그들의 상투수단이다. 모든 종류의 국수주의가 자칫하면 파시즘으로 넘어가기 쉬운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여기 있다. 내 것이면 덮어놓고 사랑하며 제일(第一)인 국수주의는 이성의 개재를 불허(不許)하는 일종의 감상주의임에 틀림없는 것이며 그렇기에 ‘피’와 ‘흙’을 돌보지 않는 여하(如何)한|154| 국수주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수주의로부터 발족하지 않는 파시즘이라곤 없는 것이다. 국수주의가 권력에의 의욕과 결부되는 순간 그것은 횡포무쌍한 파시즘으로 전화되기가 십중팔구인 것이다. 덮어놓고 내 것이 제일, 우리 민족이, 우리 문화가 제일이라는 신비주의적 국수주의 사상이 가령 제국주의와 같은 것과 손을 마주 잡게만 된다면 그것은 내(內)로는 테러와 쿠데타를 일으키고야 말 것이며 외(外)로는 만주를, 시베리아를! 이렇게 조선판 천손(天孫) 사상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재현시키고야 말게 될 것은 의심 없는 일이다. 하다면 경우에 문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더 말할 것 없이 모든 비(非)독일적인 문화를 구축(驅逐)하고 그 자리에 순수 순결한 독일적인 민족문화를 육성한다면 나치 독일의 문화정책이 과연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느냐가 무엇보다도 증거다. 문제는 오직 조선에도 과연 이 같은 파시즘의 위험이 있느냐 어떠냐에 달렸을 뿐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간단하다.

(중략)

후진사회일수록 파쇼적 폭력정치가 지배적인 것은 아무도 부정 못 할 엄연한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민주주의적 훈련’이 부족한 탓이다. 하물며 아직도 봉건유제의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고 자본주의라 하더라도 겨우 기형적으로밖에 발달 못 된 조선, 더구나 일제의 식민지라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아무러한 이렇다 할 정치적 훈련의 기회조차 가져 보지 못한 조선이 아니냐. 파시즘의 유혹에 대해서 과연 어느 정도의 용의와 준비가 있을 것인가. 진실로 이렇게 보아 오면 조선이야말로 파쇼의 번식을 위하여서는 절호의 토양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이지(理知)의 근대화도, 감정의 민주주의적 훈련도 아무것도 되어 있지를 않다. 무엇을 가지고서 그 휘황찬란한 파쇼의 유혹에서 자기를 지켜 낼 도리가 있을 것인가.

미소 양군(美蘇兩軍)만 없다면 통일은 염려 없다는 말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왜냐하면 물론 통일은 될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의 그 소위 ‘통일’이란 십중팔구는 민주주의적 통일의 반대물인 파쇼적인 통일, 비민주주의적인 통일일 것은 명약관화기 때문이다. 연합군의 감시 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공부는 뒷전으로 밀고 테러와 전제가 여하(如何)히 계속되어 부끄러울 줄|156| 모르는 조선이 아니냐. 그렇지 않아도 아시아의 해방 지역에는 독립은 상조(尙早)라는 의견이 아직도 미국 정계의 일부에는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지만은 진실로 슬픈 일이나 이유 없는 일은 아닐 상싶다. 왜냐하면 식민지 투성인 아시아에서 그 동안 그대로 독립국가로서 겨우 버티어 내려온 나라라고는 일본, 중국, 태국의 삼국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세 나라의 국정(國情)은 과연 어떠했을까. 모두가 파쇼가 아니면 독재국가가 아니었던가.

 

– <국수주의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 중에서 –

더구나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사태는 한결 더 간단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진정한 민주주의 노선만 따라만 간다면 어떤|159| 주의의 민주주의든 간에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결국은 ‘근로민주민족전선’이라고나 불릴 수 있을 그러한 유일 최종의 일로(一路)에 합치고야 말 것은 필연적인 순서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1대1만 보증된다면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다는 민주주의 부동(不動)의 원칙에 비추어194) 조선의 민주주의가 이러한 것이 되어야만 할 것은 이(理)의 당연한 자(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민주주의자는 그가 진실로 양심으로부터 민주주의자고자 하는 한(限) 안심(安心)코 반(反)파쇼 깃발 아래로 모일 수 있으며 또 모여야 할 것이다. 더구나 파시스트가 가장 두려워하는 자는 이들 근로인민이며 근로인의 단결이다. 근로자의 분열 없이 파시즘이 성공한 예라고는 없다. 문학자는 그러므로 이들 속에 들어가서 이들과 굳게 단결될 때에만 문화 조선을 파쇼적 협위에서 구출할 수 있을 가장 바르고 넓은 승리의 대로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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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주의의 파시즘화를 경계하자!

▲비합리성의 원리를 분쇄하자!

▲합리성의 원리로써 무장을 하자!

▲합리주의 사상 진영과 손을 잡자!

▲감정을 민주주의적으로 훈련하자!

▲민족 신비주의의 유혹에 속지 말자! |160|

▲민주주의 계몽운동에 적극 참가하자!

▲국제 파시즘의 뿌리를 뽑자!

▲반파쇼 깃발 밑으로 모든 민주주의자는 단결하자!

 

– <국수주의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 중에서 –

한데 아무리 학문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해도 이것은 곧 학자의 자유의 무제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진리를 위해서 탐구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국가의 이익에 위반되는 경우에는 국가의 이름으로 형벌을 받아 온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이익에 반대되는 경우에는 민족의 이름으로, 계급의 이익에 상반(相反)되는 경우에는 계급의 이름으로, 문책된다는 것을 학자는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침략의 선구로서 파견된 자원조사대원은 학술적 연구, 따라서 진리의 탐구를 위해서 온 것에 불과하다는 진변(陳辯)만으로 토인(土人)의 학살로부터 모면될 수는 도저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眞)은 진이고, 선(善)은 선이다. 한 개의 진(眞)이 동시에 국가의 선(善)이 될 경우에만, 다시 말하면 한 개의 진리가 동시에 그 국가를 ‘위한 진리’일 수 있는 경우에만 국|170|가는 학자를 존중우대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개의 진리가 동시에 민족의 선이 될 수 있는 경우에만 그 학자와 민족은 동시에 행복일 수 있는 것이며 한 개의 진리가 동시에 한 개의 계급의 선일 수 있는 경우에만 양자는 행복을 같이 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형벌 대신 표창이 비로소 보장되는 것이다. 학자는 그러므로 진리의 탐구를 통해서뿐 국가, 민족, 계급에 봉사할 수 있다 해도 진리의 탐구라는 것이 곧 학자 자신의 일신 상의 행복을 반드시 약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학자가 언제나 미리부터 알아 두어야 할 슬픈 상식이 아니면 아니 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한 개의 비극이 아니면 아닐 것이나 그러나 학자는 적어도 그가 학자인 한 자신을 언제나 진리만을 위하여 진리만 찾아내면 그만이며 누가 이것을 채택(採擇)해 주든 또 그것 때문에 어떤 뜻 않던 화가 닥쳐오더라도 개의(介意)할 것이 없다는 거연(巨然)한205) 태도와 용의(用意)206)와 결의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이 같은 용의와 결의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용의와 결의에는 어느 의미에서는 순교자의 그것과 흡사한 비장한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은 이것이 없이는 학자는 그가 적어도 진리탐구라는 본래적인 사명의 완수를 기(期)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 <연구와 발표의 자유> 중에서 –

다시 오지 않을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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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 사상과 현실, 주문하신 분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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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의 『사상과 현실』 주문 방법 세 가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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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 <사상과 현실>은 스마트폰이나 PC에서 읽을 수 있는 전자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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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 생애 연보

박치우 생애 연보

박치우 생애 연보(이것은 부록3으로 실려 있음)

1909. 8. 22. 박치우 함경북도 성진(城律) 출생. 본적은 함경북도 경성군 나남면 미길정 7번지. 부친 박창영(1880-1940), 함남 단천 출생. 박치우가 태어났을 때 부친 박창영은 전도사였음.
* <조선문예가 총람>(『문장』, 1940. 1.)은 박지우의 출생지를 함북 성진(城律)으로 기재하고 있으나, <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조광』, 1936. 1.)에 소개된 저자 약력에는 함남 단천으로 되어 있음.
1910. 부친 박창영, 평양 장로회 신학교 입학(6회).
1913. 3. 부친 박창영, 평양 장로회 신학교 졸업(6회)하고 함경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성진 중앙교회 부임.
1920. 박치우, 보통학교 5학년 때 형수를 잃고 형수의 죽음을 크게 슬퍼함.
1925. 5. 12. 조선총독부, 사회주의에 대처하기 위해 치안유지법 시행.
1922. ~ 1925. 박치우, 중학생 시절 철학 공부에 뜻을 둠.
1928. 3. 3. 박치우, 함경북도 경성(鏡城)고등보통학교 졸업.
1928. 4. 1. 박치우,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B조 제5회 입학.
1930. 3. 박치우, <돌아가는 맹자(歸り行く孟子)>(경성제국대학 학우회 편, 『청량』 제8호) 발표.
1930. 3. 31. 박치우,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5회 수료.
1930. 4. 1. 박치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제5회 진학. 철학·철학사 전공.
1930. 박치우의 형 박치목(함경북도 청진 소재의 소련공사관 근무)은 김기진이 ML당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맹장염으로 병보석된 이성태(李星泰)를 러시아로 망명시킬 때 도움을 주었음.
1931. 6. 17.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 제6대 조선총독 부임(1931. 6. 17. ~ 1936. 8. 4.).
1931. 9. 18. 만주사변 발발.
1931. 5. 신간회(1927년 2월 15일 조직) 해체.
1931. 10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
1931. 11. 29. 박치우, 야마다(山田) 총장 환영음악회에 연주자로 참여.
1932. 3. 1. 만주국 선포. 3월 9일 푸이가 집정에 취임.
1932. 4. 22 <철학연구회> 창립.
* 철학연구회는, 경성제대 내 철학연구실 관계자 신남철(경성제대 철학과 3회 졸업생) 윤태동(철학 전공, 조선어 강사), 이종우, 권세원 등이 먼저 철학연구회 조직에 관한 의견을 교환한 결과 전공과 정치적 입장을 떠나 오로지 학문적 연구의 입장에서 연구기관을 조직하자는 의견을 나눈 후 칸트 208회 생일(1724년 출생)인 1932년 4월 22일에 위 사람들과 안호상, 최현배, 김두헌 총 7명에 의해 윤태동의 집에서 창립되었음. 회원으로는 이관용, 김법린이 포함되어 있었음. 이재훈, 박종홍, 박치우 등은 나중에 참여했을 것이라 추측됨. 철학연구회는 한국 최초의 철학 전문잡지 『철학』 1호(1933. 7, 17) 『철학』 2호(1934. 4. 1) 『철학』 3호(1935. 6. 20)를 발간했고 총 3회(1회: 1933년 10월 21일. 2회: 34년 4월 14일. 3회: 34년 10월 27일) 공개 철학강연회를 동아일보사 학예부 후원 하에 주최했음.
1933. 3. 5. 독일, 나치당이 총선거에서 승리. 히틀러가 바이마르 헌법을 폐지하고 권력 장악하기 시작.
1933. 3. 일본, 국제연맹 탈퇴.
1933. 3. 31 박치우,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 제5회 졸업. 졸업논문으로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존재론에 대하여>(지도교수 미야모토 카즈요시(宮本和吉))를 제출함. 철학과를 졸업한 동기로는 박종홍(선과 입학), 고형곤, 이갑섭, 이진숙(심리학 전공), 홍정식(교육학 전공)이 있음.
1933. 4. 일본 교토대학 타키가와 사건 발생.
1933. 4. 1. 박치우, 미야모토 카즈요시(宮本和吉) 교수 연구실 조수(2년 계약직)로 발령.
1933. 5. 10. 독일 베를린 분서사건.
1933. 9. 독일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던 안호상은 1932년 성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 미야모토 카즈요시(宮本和吉) 양 교수 지도 하에 1933년 9월 <논리학에 대한 변증법과 사색성>이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심사를 받고 있는 중이었음.
1934. 4. 1. 박치우, <위기의 철학>(『철학』 1권 2호, 철학연구회) 발표.
1934. 5.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 적화 공작사건.
1934. 9. 12. 박치우, 숭실전문학교(평양) 교수로 부임.
1934. 9. 19. 박치우, 경성제대 연구실 조수 사직.
1935. 1. 11. 박치우, <나의 인생관: 인간철학 서상>(『동아일보』)으로 민간 학술 영역에 첫 등장.
1935. 5. 30. 카프 해체(카프 서기장 임화).
1935. 6. 21. 프랑스 파리에서 21일부터 25일까지 문화옹호 국제작가회의 개최. 38개국에서 230명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회의 의장은 앙드레 지드. 그 밖에 로맹 롤랑, 하인리히 만, 토마스 만, 막심 고리키, 포스라 헉슬리, 버나드 쇼, 싱클레어 루이스, 셀마 라겔뢰프, 바르 잉클랑 등 12명이 참여했으며, 그들은 협회 본부를 파리에 두고 자국에는 서기국을 만들기로 함.
1935. 7. 25. 제3 인터내셔널 7차대회(모스크바) 개최.
1936. 2. 26. 도쿄에서 발생한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 2·26사건 발생.
1936. 봄. 박치우 모친 별세. 박치우, 김종숙과 결혼.
1936. 7. 17. 스페인 내전 시작.
1936. 8. 5. 미나미 지로 제7대 조선총독 부임(1936. 8. 5. ~ 1942. 5. 29.).
1936. 10. 25. 독일과 이탈리아, 추축국 결성.
1936. 11. 5. 일본, 독일과 방공 협정 체결.
1936. 12. 20.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시행.
1937. 7. 7. 일본, 중국을 침략하며 중일전쟁 시작.
1937. 10. 2. 조선총독부, 황국신민의 서사 제정.
1938. 3. 31.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전문학교 폐교. 박치우, 숭실전문학교 교수 사직.
1938. 4. 1. 박치우, 조선일보 사회부 및 학예부 기자 발령. 이원조, 김기림을 상관으로 모심.
1938. 1. 16. 일본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의 제1차 성명 발표.
1938. 2. 지원병제 실시.
1938. 3. 8. 조선총독부, 칙령 제103호로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 1938년 4월부터 조선어 상용 및 교육을 금지하고 일본어를 보급하는 황국신민 정책 시행.
1938. 4. 1. 일본은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인력과 물자 동원을 위해 법률 제55호로 <국가총동원법> 제정 공포. 조선에서는 5월 4일부터 시행.
1938. 7. 조선총독부,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족.
1938. 11. 3. 코노에 후미마로 일본 수상의 제2차 동아신질서 성명.
1938. 12. 14. 오후 6시 경성부민관 강당에서 좌담회 <시국유지원탁회의>(주제: 1. 내선일체의 구현화문제 2. 동아협동체의 건설문제 3. 국내혁신의 제 문제) 개최. 참석자: 이광수, 인정식, 갈홍기, 주요한, 이각종, 안준, 권충일, 차재정(사회), 조병옥, 현영섭, 차상달, 윤형식, 조두원, 유형기, 하경덕, 주련, 김동일.
1938. 12. 22. 코노에 후미마로 일본 수상의 제3차 동아신질서 성명.
1939. 1. 5. 제1차 코노에 내각 총사퇴.
1939. 4. 박치우 부친 박창영, 함북 온성군 훈계 교회 시무 중 별세.
1939. 8. 23. 소련과 독일의 상호불가침조약 체결.
1939. 9. 1. 새벽 4시 45분 독일의 폴란드 서쪽 국경 침공. 제2차 세계대전 개시.
1939. 9. 3. 영국과 프랑스, 독일에 선전포고함.
1939. 11. 10. 조선민사령 개정(제령 제19호와 제20호)으로 창씨개명 방침 발표(1940년 2월 11일 효력 발휘).
1940. 6. 22. 경성제대가 고대철학 연구를 위한 박치우의 대학원 입학을 허가함.
1940. 7. 22. 제2차 코노에 내각 성립. 신체제 운동 전개.
1940. 8. 10. 조선일보 폐간. 박치우, 조선일보 퇴직. 퇴직금으로 천원을 받음.
1940. 9. 27 독일, 이탈리아, 일본 삼국군사동맹 체결.
1940. 10. 조선총독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칭.
1941. 3. 1.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조선총독부령 제48호) 제정 및 시행.
1941. 3. 31. 조선교육령 개정(조선어 교육 완전 폐지).
1941. 4. 13. 일소 중립조약 체결.
1941. 6. 22. 독일의 소련 침략.
1941. 7. 3. 스탈린, 제2차세계대전을 파시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십자군 전쟁이라 규정.
1941. 12. 7. 일본의 진주만 공격. 히틀러의 미국 선전포고.
1942. 6. 이 시절 박치우는 조광사(1941년 6월 13일 설립, 대표 방응모, 인쇄업) 감사로 재직 중이었음.
1942. 12. 의무교육제도 시행 발표(1944년부터 시행할 징병제의 기반 조성).
1943. 1. 25. 박치우, <아리스토텔레스의 산문론(アリストテレスの散文論)>(『학총』 제1집 동도서적주식회사.) 발표.
1943. 2. 1943년 2월 <내가 꿈꾸는 신무기> 설문에 응답한 것을 마지막으로 박치우는 절필하고 만주로 떠남.
1943. 4. 1. 제4차 조선교육령 개정 시행.
1943. 11. 27. 미·영·중 연합국의 카이로 선언.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 여기서 조선의 독립을 최초로 보장.
1944. 8. 10. 여운형, <조선건국동맹> 비밀리에 결성.
1945. 5. 조선총독부, 전시교육령 공포.
1945. 6. 26. <국제연합헌장> 발표.
1945. 5. 7. 독일 항복.
1945. 7. 26.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중화민국, 소련의 포츠담 선언. 이 회담에서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처리 문제 논의.
1945. 8. 2. 소련 참전 선언.
1945. 8. 6. 미국,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1945. 8. 8. 박치우, 북경에서 단파방송으로 일제가 무조건 항복할 것을 알았음. 소련군, 만주와 한반도 북부 점령.
1945. 8. 10. 박치우, 일본 정부 수뇌부가 어전회의에서 무조건 항복 결정했다는 뉴스 청취.
1945. 8. 11. 박치우, 11일 아침 천진으로 출발하고 12일 천진을 떠나 15일 오후 창춘(新京)에 도착하여 해방을 맞이했음. 미국 3부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 Dunn)은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함. 이에 미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대령(이후 주한미군사령관 역임)과 미 육군 장군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중령(이후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은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음.
1945. 8. 15. 박치우, 창춘에서 조선의 해방을 맞이함. 창춘 시내 각처에서 시가전이 벌어져 상당한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고, 재류동포들을 모아 민단을 조직함과 동시에 중국 국민당 지하조직체와 연락하여 “조선민족과 중국민족은 조금도 충돌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이번 종전으로서 한층 더 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의 삐라와 포스터를 국민당의 이름으로 찍어 트럭에 실어 가지고 중국인 시가에 뿌리고 중국인을 상대로 가두연설도 하여 무용의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했음.
1945. 8. 16. 박치우, <조선학술원&glt;(8월 16일 결성) 산하 실무진으로 선임됨.
1945 8. 18. 박치우,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1945년 8월 18일 결성) 산하 <조선문학건설본부> 평론부 위원으로 선임됨. 이원조가 <조선문학건설본부> 서기장 및 평론부 위원장을 맡았고, 박치우는 서인식, 조윤제와 함께 평론부 위원으로 선임됨.
1945. 8. 20.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 결성.
1945. 9. 6. <조선인민공화국> 건국 선포. 이승만을 주석으로, 김구를 내정부장으로 내정.
1945. 9. 7. 김성수, 송진우, 서상일 등 동아일보사 계열 인사들은 <국민대회준비위원회>(위원장 송진우)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을 계획.
1945. 9. 8. 미군, 인천 상륙. 윤보선의 집 안동장에서 ‘인민공화국 타도하자’라는 선언문 채택과 함께 <한국민주당> 정식 창당. 9월 16일 창당대회 개최.
1945. 9. 12. 장안파 공산당을 흡수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1945. 10. 10. 미군정, 군정청 법령 제21호(일제 강점기 법률체계 계승) 공포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해체를 명령함.
1945. 10. 16. 이승만, 맥아더가 내준 항공기 편으로 환국.
1945. 10. 20.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당.
1945. 10. 25. 이승만, 정당 통일 목적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한민당, 국민당, 공산당 등 각 문화단체 대표 2백여 명 참석.
1945. 10. 박치우, 북한을 거쳐 10월 하순 귀국.
1945. 10. 30. 통일전선 결성을 둘러싸고 이승만과 박헌영이 첫 번째 회합을 가짐.
1945. 11. 4. <독촉중앙협의회> 이승만, 연합국에 보내는 결의문 발송.
1945. 11. 8. 박치우, 『중앙신문』 <문화왕래> 소식에 “평론가 박치우씨 8월 15일 이후 신경(新京) 거류민단 대표위원으로 활약하던 바 근일 귀경”으로 소개됨.
1945. 11. 10. 『중앙신문』에서 박치우를 ‘임시정부 영수 환국 전국환영회’(위원장 김석황) 보도부 위원으로 소개. <해방일보사>(『해방일보』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기자 자격으로 보도부 위원이 된 것 같음.
1945. 11. 7. 이승만, 인공 주석 취임을 공식 거부.
1945. 11. 16. 통일전선 결성을 둘러싸고 이승만과 박헌영의 두 번째 회합.
1945. 11. 21. 이승만,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 방송.
1945. 11. 23. <중경 임시정부> 요인 김구, 김규식, 이시영, 엄항섭, 유동열 등 1차 환국.
1945. 11. 27. 인공 측 허헌이 김구, 김규식을 방문하여 인공 중앙위원 취임을 요청함.
1945. 11. 30. 박헌영, 오후 7시부터 약 15분간 중앙방송국을 통하여 <진보적 민주주의 깃발 밑에서> 제목 아래 방송함.
1945. 12. 2. <중경 임시정부> 요인 홍진, 장건상, 성주식, 유림, 김성숙, 조소앙, 김원봉, 최동호, 신익희, 조완구 등 2차 환국.
1945. 12. 5. <조선공산당> 박헌영, 연합국에 보내는 메시지 발송. <조선공산당>은 이승만의 ‘덮어높고 뭉치자’는 무원칙 통일론 반대, ‘선 친일파제거 후 통일론’ 주장.
1945. 12. 13. <조선문학동맹> 결성. 박치우, 조선문학동맹 평론부(위원장 김태준) 위원이 됨.
1945. 12. 16. 미국, 영국, 소련은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함. 27일 조약문서 서명.
1945. 12. 17. 김일성을 <북조선로동당> 책임비서로 선출.
1945. 12. 21. 서울운동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전국 환영대회’ 개최.
1945. 12. 23. 조선공산당, 성명서 <통일방해자는 그대, 노(老)파시스트 이박사를 폭로함> 발표. 또, 조선공산당은 임정에 친일파 민족반역자, 국수주의자 등을 제외하고 좌·우익 반반의 수가 참여하는 통일원칙 제시. 임정 측은 조공의 통일원칙 거부.
1945. 12. 24. 조선공산당, <독촉>과 일체 관계를 파기한다는 성명서 발표.
1945. 12. 27. 조선과 소련 양국의 친선과 문화 교류와 발전을 위하여 각계 자연과학·인문과학·예술계·법조계·언론계를 망라한 대표 200여 명의 발기인이 참석하여 ‘조소(朝蘇)문화협회’(홍명희 회장 취임)를 창립. 신남철(경성제대 철학과 3회 졸업)이 개회사를 맡았고 박치우가 경과 보고를 맡았음. 샤브신(A. I. Shabshin) 소련 부영사가 특별내빈으로 참석.
1945. 12. 27. 『동아일보,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제목 아래 신탁통치 오보 기사 냄.
1945. 12. 28. 오전 6시(모스크바 시간)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 결정서 발표. 28일 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로서 신탁통치문제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간부 김일성 등과 논의하기 위해 평양 방문하고 12월 28일부터 1월 2일까지 체류함. 이 때 박치우도 김태준과 함께 박헌영과 동행함. 정태식이 <국내에 당면한 과업은 <파시즘> 근멸투쟁이다>라는 제목으로 박헌영의 원고를 하오 7시 15분에 대독 방송함.
1945. 12. 29. 중경 <임시정부> 세력은 반탁 결의문을 채택하고,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함.
1945. 12. 30. 김구의 <임시정부>, 국자(國字) 제1호를 발표하고 전 국민 파업과 철시 지시, 미군정에게 정권 이양을 요구하고 정부를 접수하려 함.
한국민주당 당수(수석총무) 송진우,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지지를 암시하였다는 이유로 새벽 6시 원서동 자택에서 괴한(한현우, 유근배)의 습격을 받고 암살당함.
1945. 12. 31. 박치우는 12월 31일 신탁통치 반대 강연에 백남운, 신남철 등과 함께 연사로 참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평양에 갔기 때문에 연사로 참여하지 못했을 수 있음.
좌익 40여 단체는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신탁통치 철폐를 위한 통일전선 결성’을 요구함. 31일 밤 <인민공화국> 대표 홍남표, 정백, 홍중식, 이강국 등과 <임시정부> 대표 최동오, 성주식, 장건상 등이 만남. <인민공화국> 측이 <임시정부> 측에 임정과 인공의 통일위원회 구성을 제의함. <임시정부> 대표들은 공문 발송 요청.
1946. 1. 1. <인민공화국>, 상오 9시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앞으로 보내는 통일위원회 구성을 제안하는 공문을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동호에게 넘김. 최동호, 공문 접수 서약서 씀. <임시정부>, 하오 6시 ‘서식상 접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공문 반송.
김구, 미군정청의 요청에 따라 복업을 요망하는 방송을 함.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우익세력의 공격에 대한 경고 성명 발표.
1946. 1. 2. 북한의 각 정당·사회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
1946. 1. 3. 박헌영이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조선공산당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 조선공산당,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서울시민대회’ 개최(약 50만 명 참가).
1946. 1. 4. 김구, 성명서 발표. 이 성명에서 각계·각당 대표가 참가하는 비상정치회의를 소집, 임정을 확대·강화한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헌법과 선거법을 만들어 국민대표대회를 소집, 정식 정권을 수립하자고 밝힘.
1946. 1. 7. >박치우, <탁치와 민족통일 – 혁명세력은 하나가 되라>(『중앙신문』 67-68호, 1946. 1. 7·8.) 발표. 인민당, 공산당, 국민당, 한민당 대표들의 4당 간담회 개최. 조선에 관한 모스코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합의.
1946. 1. 8. 4당 합의에 따라 ‘4당 코뮤니케’ 발표. 한민당, 국민당은 4당 코뮤니케 파기 성명서 발표. 군청청이 김구 세력의 <탁치반대 국민총동원회>와 이승만 세력의 <대한독립촉성중앙위원회>의 통합을 요청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결성됨. <대한민국 민주의원> 발족(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규식, 총리 김구).
1946. 1. 16. 서울 덕수궁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의 개최. 정태식이 밤 7시 15분부터 20분간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삼상회의의 조선에 대한 결정을 지지하자’는 제목의 박헌영 원고를 대독 방송함.
1946. 1. 18. 미군, 학병동맹사무소 습격,간부 3명 사살, 33명 검거 투옥. 학병동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해산 명령.
1946. 1. 19. 좌익 29개 단체, <민주주의민족전선> 발기준비위원회 개최
1946. 1. 20. 김구 계열, 20일 21일 이틀에 걸쳐 경교장에서 비상정치회의주비회 개최. 김원봉(신한민족당), 성주식(조선민족혁명당), 김성숙(조선민족해방동맹) 등은 탈퇴함.
1946. 1. 31. 박치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준비위원으로 1차 회의 참석.
1946. 2. 1. 김구 계열과 이승만 계열의 합세로 서울 명동 성당에서 <비상국민회의> 개최. ‘최고정무위원회’ 구성을 결정하고(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 김규식 선출) 그 인선을 이승만과 김구에게 일임.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준비위원회, 2월 1일 8개항의 <민전선언> 발표. 선언 2항에서 “민전은 조선인민의 총투표로써 선거될 인민대표대회가 구성될 때까지 과도적 임시국회의 역할을 할 것이며 임시적인 민주주의정부 수립의 책임을 자부함”이라고 그 성격과 역할을 명시함.
1946. 2. 3. 박치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준비위원회 사무국 선전부원 됨.
1946. 2. 8. 박치우,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 참석하여 특별보고 <국수주의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를 발표함. 박치우의 특별보고는 이원조의 제안으로 긴급동의에 부쳐져 참가자들에 의해 결의안이 채택되었음. <조선문학동맹>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개칭. 박치우, <조선문학가동맹> 가입.
1946. 2. 14.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의 개칭) 개최. 민주의원은 하지의 자문기관으로서 과도정부를 촉진시키는 사명을 갖게 됨.
1946. 2. 15. 박치우, YMCA 회관에서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공동 의장 여운형, 허헌, 박헌영, 김원봉)에 <조선문화협의회> 대표 자격으로 출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됨.
1946. 2. 20. 미군정청, 군정청법령 제55호(<정당등록법>) 공포.
1946. 2. 21. 박치우, <민주주의민족전선> 교육문화대책 연구위원에 선정.
1946. 2. 24.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결성대회 개최.
1946. 3. 5. 박치우, 춘천에서 개최된 제5회 문예강연회에서 <민주주의의 철학적 해명> 발표.
1946. 3. 20. 서울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소련측 수석대표 스티코프 중장, 미국측 수석대표 아놀드 소장) 개최.
1946. 3. 25. 『현대일보』 창간. 박치우, 발행인·주필 맡음. 『현대일보』는 문단과 평론계 중진들 사이에서 발간을 준비했고, ‘자유조선의 소리’, ‘세계민주주의의 전령’, ‘새 나라 건설의 전령’을 슬로건으로 내세웠으며, 청년 학도를 독자로 발행된 신문이었음. 현대일보사는 주간에 소설가 이태준(李泰俊), 편집장에 시인 김기림(金起林)(나중에 이원조가 편집장을 맡고 김기림은 고문을 맡게 됨), 외보책임자에 김영건(金永健)을 기용했음.
1946. 4. 3. 박치우, 박헌영의 평양 방문 2차 동행(1946. 4. 3 ~ 4.)
1946. 4. 15. 박치우,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주최로 산하 22개 문화학술단체를 총동원한, 4월 15일부터 5일간 열린 <민족문화건설 전국회의> 첫째 날에 문화 일반에 관한 보고의 일환으로 <민족문화와 세계관>을 발표함.
1946. 4. 17. <조선공산당> 창건 21주년 기념식.
1946. 5. 6. <미·소 공동위원회>(미국 측 수석대표 아놀드 소장, 소련 측 수석대표) 제1차 회의 무기 휴회 발표.
1946. 6. 23. 서울의 소련 영사관 폐쇄.
1946. 5. 18. 미군정청, 위조지폐 사건을 빌미로 정판사 빌딩 폐쇄. 『해방일보』 무기 정간 처분.
1946. 6. 3. 이승만, 전북 정읍에서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이라고 발언함.
1946. 6. 9. 미군정청, <국립종합대학안> 발표. 그 후 대규모의 국대안 반대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3개 대학이 폐쇄되고 380명의 대학 교수가 파면되었으며 5763명의 학생이 제적 처분을 받았고 570명에 이르는 교수, 학생이 검거, 투옥되었으며, 학생 1명이 죽었음.
1946. 6. 20. 박치우, <조선문학신인회> 결성에 참여.
1946. 6. 26. 혜화전문학교가 1946년 9월 신학기부터 동국대학으로 개칭하고 학생 모집을 위해 강좌와 교수를 소개하는 신문 광고(『중앙신문』, 1946. 6. 26.)를 냄. 박치우는 철학개론 강좌를 맡기로 되어 있었음.
1946. 6. 27. 박치우, 박헌영의 평양 방문 3차 동행(6. 27. ~ 7. 12.).
1946. 7. 13. 서북청년회 소속 20여 명의 청년들이 현대일보사를 방문하여 박치우에게 상해를 가함. 7월 11일자 기고 단평인 김명희의 <지방열을 타파하자!>라는 글이 우익을 자극하였기 때문. 박치우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혹독한 테러를 당함. 김남천은 이때 박치우가 “불굴한 신념과 초탈한 면모”로 그 의연함을 보여주었다고 회고했음. 서북청년회 청년들은 곧 구속 수사를 받았지만 테러 사건이 아니라 단순 폭력 행위로 처리되어 석방됨. 장택상은 박치우의 고소가 있다면 폭력범으로 입건하겠다고만 밝힘. 현대일보사는 16일 서북청년단체 대표에게 사과문을 보내고 17일 문제의 기사를 취소함.
1946. 7. 20. 박치우, 7월 20일부터 1주일 간 <조선문학신인회> 신인문학 강좌 강사로 활동.
1946. 8. 1. 박치우, 민청 청년 반전(反戰) 대회에서 ‘반전과 문화’ 제목으로 강연함.
1946. 8. 28. <북조선로동당> 창당.
1946. 8. 29. 민주적 대중단체들(전평, 전농, 민청, 부총, 문련, 반팟쇼반일운동자구원회, 재일본조선인연맹, 협동조합연합회 등)이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동문제를 객관적 입장에서 검토하기 위해 문련 주최로 간담회 개최, 토의 결과 3당합동촉진위원회 구성. 3당합동촉진위원회는 박치우를 사무장으로 임명함. <북조선로동당> 창당.
1946. 8. 31. 남로당준비위원회 구성.
1946. 9. 3. 조선공산당, 하지 중장의 8월 31일 성명에 대한 성명서 발표.
1946. 9. 6. 미군 헌병들이 『현대일보』,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3사를 수사하고 기자 다수를 연행. 이때 이후로 박치우 잠적함.
1946. 9. 7. 조선주둔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태평양 점령군사령부 포고령 제2호에 따라 주한미군의 안전을 위태롭게 했다는 사유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 이단하, 이강국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림. 미군정은 이들과 관계되어 있다고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에 대해서도 무기한 정간 처분을 내림. 『현대일보』 정간 사유는 구체적으로 『현대일보』 제165호 9월 6일자 2면에 <하 중장 성명에 대하여 (상)―조공 중앙위원회 서기국 성명>(9월 3일 조선공산당의 성명서)을 실었다는 것이었음. 박치우는 책임자로서 법정에 소환됐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잠적함. 미군정은 『현대일보』의 소유자인 박치우의 부재를 이유로 판권을 박탈하고 이듬해 우익계열 <대한독립 청년단>의 서상천에게 발행을 맡김. 추후 군사법정은 『조선인민보』의 정우순, 『중앙신문』의 이상호·황대벽 기자에게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함.
1946. 9. 23. 철도노동자, <남조선철도종업원 대우개선투쟁위원회> 조직하여 파업 개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9월 24일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 조직.
1946. 10. 10월 대구 인민항쟁.
1946. 10. 4. 여운형, 우측 대표 5인과 단독으로 좌우합작 7원칙 공동서명.
1946. 10. 7. 좌우합작위원회, 좌우 합작 7원칙 발표. 좌우 합작은 민전(장건상, 박건웅)과 민주의원의 대표들 간의 접촉으로 시작되고 7원칙 발표와 함께 사실상 끝난 셈.
1947. 10. 15. 사회노동당준비위원회 발족.
1946. 11. 20. 백양당(白楊堂)에서 박치우의 평론집 『사상과 현실』 발행. 1947년 4월 10일에 재판 발행.
1946. 11. 23. 3당 합동을 통한 남로당 결성.
1946. 12. 4. 여운형, 합작·합당 포기를 선언하고 정계은퇴를 표명한 <자기비판의 서> 발표.
1946. 12. 7. 백남운, 정계은퇴 성명서 발표.
1946. 12. 12.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개원.
1947. 박헌영은 1947년 초 서울 및 남한과의 연락을 위한 전초기지로 황해도 해주에 지도부를 설치. 이때 박치우는 남로당 간부 박승원, 문학가 이원조, 임화, 김태준, 이태준, 문용식 등과 함께 실무자로 활동을 시작했음. 부대시설로서 인쇄소와 출판사, 상사 등을 북측으로부터 제공받았는데, 북로당 황해도당이 사용하던 제일인쇄소(삼일출판사)를 거점으로 활용. 제일인쇄소에서 『인민의 벗』, 『민주조선』, 『인민조선』, 『노력자』 등 각종 선전물을 만들어서 서울로 보냈음.
1947. 3. 1. 민전, ‘3·1운동’ 기념 시민대회(서울 남산공원) 개최. 우익 진영, ‘기미선언기념 전국대회’(서울운동장) 개최. 좌우 투석전으로 16명 사망.
1947. 3. 12. 트루만 미국 대통령, 트루만 봉쇄독트린 발표. 반소반공정책 강화.
1947. 3. 22. 3·22 총파업. 50만의 조직 노동자, 17만의 농민, 8만의 시민·학생이 참가하여 가두 시위.
1947. 5. 8. 백남운, 정치 활동 재개.
1947. 5. 21.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 미국측 수석대표는 브라운 소장, 소련측 수석대표는 스티코프 중장.
1947. 5. 24. 여운형, <근로인민당> 결성.
1947. 6. 5. 미국 대통령 트루만, 마샬플랜 발표.
1947. 7. 19. 여운형, 극우파 청년 한지근에게 암살당함. 좌우합작 운동 사실상 붕괴.
1947. 7. 27. 남로당, 미·소공위 경축 임시정부수립 촉진 인민대회 개최. 서울 남산공원에 50만 명의 시민이 참가.
1947. 8. 상순. 미군정, ‘8·15기념대회’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좌익에 대한 대규모 탄압과 수천 명의 요인 검거 착수.
1947. 9. 17. 미국은 한국의 독립에 관한 모든 문제를 국제연합(UN) 제2차 총회에 제의함.
1947. 9. 26. 서울에서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 개최.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수석대표 스티코프 중장은 미·소 양군 동시철수를 제안함.
1947. 10. 18. <미·소 공동위원회>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은 국제연합 총회에서 한국 문제를 심의할 동안 미·소공동위원회 휴회를 제안함.
1947. 10. 박치우, 박헌영이 설립한 정치·군사학교의 성격을 가진 당간부 양성소 〈강동정치학윈> 정치부·교무부 주임(부원장) 맡음. <강동정치학원>은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면 입석리 대성탄광 합숙소 자리에 위치.
1947. 11. 14. <국제연합(UN)>은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미국 측 제안을 가결.
1948. 1. 1. <강동정치학원> 개원. 북로당 정치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소련 공산당원이었던 표드르 박(본명 박병률)이 원장을 맡았으며, 군사부의 주임(부원장)은 의용군 출신의 박모였고 부주임은 빨치산 출신의 서철이었으며, 박치우는 교무부·정치부 주임(부원장)을 맡았음.
1948. 1. 8.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회>, 서울 도착. 북한 인민위원회와 소련은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회의 북한 방문을 거부함.
1948. 2. 7. <남로당>은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회>의 목표가 남한 단독선거 실시임을 명확하게 의식하자 2·7 구국투쟁을 조직하여 남로당의 조직력을 과시함. 이를 계기로 좌익 세력에 대한 대규모 검거와 투옥의 회오리 바람이 붐. 남로당은 당 조직의 붕괴를 막기 위해 ‘입산 부대’(야산대라고도 했음)의 유격투쟁을 조직하게 됨.
1948. 2. 16. <국제연합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안’, 즉 남한만의 단독선거안을 가결시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완전 와해.
1948. 3. 25. 북한,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제안.
1948. 4. 3. 제주 4·3 항쟁 발생.
1948. 4. 19. 북한,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또는 <남북 연석회의> 개최.
1948. 4. 30.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명의로 공동성명서 발표.
1948. 5. 10. 남한 단독 선거 실시.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 8. 23.~25.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개최. 이때 박치우는 서기국원으로 활동.
1948. 8. 2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실시.
1949. 6. 26. 백범 김구, 서울 경교장 서재에서 군인 출신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함.
1949. 7. 전남 남원에서 토벌대에 의해 김태준 체포됨.
1949. 9. 6. 박치우는 9월 총봉기를 위해 이호제(고려대학 31회 졸업, 남조선 민청 위원장 역임)가 지휘하는 강동정치학원 출신 제1병단 5개 중대 360명과 함께 인민유격대 정치위원으로서 태백산 지구를 통해 남하함. 먼저 침투했던 제3병단의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2개월간 국군과 대치.
1949. 11. 김태준, 수색 근처에서 사형당함.
1949. 12. 4. 『동아일보』와 『자유신문』 1946년 12월 4일자에 약 2주일 전 태백산 전투에서 박치우를 사살했다는 기사 보도. 박치우는 제3병단의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태백산 지구에서 전투를 벌이다 국군과 경찰의 토벌대에 의해 사살됨. 박치우는 11월 20일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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