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ub 파일을 pdf 파일로 변환하는 사이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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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 사상과 현실, 주문하신 분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제 앱들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박치우의 『사상과 현실』 주문 방법 세 가지 설명

박치우의 『사상과 현실』 주문 방법 세 가지 설명

박치우 <사상과 현실>은 스마트폰이나 PC에서 읽을 수 있는 전자책입니다.

책 소개는 https://hpepub.com 에서

또는 사이트 신간소식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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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방법 세 가지

주문 방법 1
사이트 회원 가입을 통한 책 주문은 서점(사이트주문) 메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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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방법2
사이트에서 회원 가입 못하시는 분은 이메일을 통한 주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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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방법 3
통장 입금하고 문자메세지로 주문자의 정보(성명, 주소, 스마트폰 번호, 이메일 주소)를 제게 보내주셔야 합니다. 제 전화번호는 010 7342 8207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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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금하신 후에, 선물일 경우에도 상대방 전화번호 등을 제게 보내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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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 생애 연보

박치우 생애 연보

박치우 생애 연보(이것은 부록3으로 실려 있음)

1909. 8. 22. 박치우 함경북도 성진(城律) 출생. 본적은 함경북도 경성군 나남면 미길정 7번지. 부친 박창영(1880-1940), 함남 단천 출생. 박치우가 태어났을 때 부친 박창영은 전도사였음.
* <조선문예가 총람>(『문장』, 1940. 1.)은 박지우의 출생지를 함북 성진(城律)으로 기재하고 있으나, <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조광』, 1936. 1.)에 소개된 저자 약력에는 함남 단천으로 되어 있음.
1910. 부친 박창영, 평양 장로회 신학교 입학(6회).
1913. 3. 부친 박창영, 평양 장로회 신학교 졸업(6회)하고 함경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성진 중앙교회 부임.
1920. 박치우, 보통학교 5학년 때 형수를 잃고 형수의 죽음을 크게 슬퍼함.
1925. 5. 12. 조선총독부, 사회주의에 대처하기 위해 치안유지법 시행.
1922. ~ 1925. 박치우, 중학생 시절 철학 공부에 뜻을 둠.
1928. 3. 3. 박치우, 함경북도 경성(鏡城)고등보통학교 졸업.
1928. 4. 1. 박치우,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B조 제5회 입학.
1930. 3. 박치우, <돌아가는 맹자(歸り行く孟子)>(경성제국대학 학우회 편, 『청량』 제8호) 발표.
1930. 3. 31. 박치우,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5회 수료.
1930. 4. 1. 박치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제5회 진학. 철학·철학사 전공.
1930. 박치우의 형 박치목(함경북도 청진 소재의 소련공사관 근무)은 김기진이 ML당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맹장염으로 병보석된 이성태(李星泰)를 러시아로 망명시킬 때 도움을 주었음.
1931. 6. 17.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 제6대 조선총독 부임(1931. 6. 17. ~ 1936. 8. 4.).
1931. 9. 18. 만주사변 발발.
1931. 5. 신간회(1927년 2월 15일 조직) 해체.
1931. 10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
1931. 11. 29. 박치우, 야마다(山田) 총장 환영음악회에 연주자로 참여.
1932. 3. 1. 만주국 선포. 3월 9일 푸이가 집정에 취임.
1932. 4. 22 <철학연구회> 창립.
* 철학연구회는, 경성제대 내 철학연구실 관계자 신남철(경성제대 철학과 3회 졸업생) 윤태동(철학 전공, 조선어 강사), 이종우, 권세원 등이 먼저 철학연구회 조직에 관한 의견을 교환한 결과 전공과 정치적 입장을 떠나 오로지 학문적 연구의 입장에서 연구기관을 조직하자는 의견을 나눈 후 칸트 208회 생일(1724년 출생)인 1932년 4월 22일에 위 사람들과 안호상, 최현배, 김두헌 총 7명에 의해 윤태동의 집에서 창립되었음. 회원으로는 이관용, 김법린이 포함되어 있었음. 이재훈, 박종홍, 박치우 등은 나중에 참여했을 것이라 추측됨. 철학연구회는 한국 최초의 철학 전문잡지 『철학』 1호(1933. 7, 17) 『철학』 2호(1934. 4. 1) 『철학』 3호(1935. 6. 20)를 발간했고 총 3회(1회: 1933년 10월 21일. 2회: 34년 4월 14일. 3회: 34년 10월 27일) 공개 철학강연회를 동아일보사 학예부 후원 하에 주최했음.
1933. 3. 5. 독일, 나치당이 총선거에서 승리. 히틀러가 바이마르 헌법을 폐지하고 권력 장악하기 시작.
1933. 3. 일본, 국제연맹 탈퇴.
1933. 3. 31 박치우,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 제5회 졸업. 졸업논문으로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존재론에 대하여>(지도교수 미야모토 카즈요시(宮本和吉))를 제출함. 철학과를 졸업한 동기로는 박종홍(선과 입학), 고형곤, 이갑섭, 이진숙(심리학 전공), 홍정식(교육학 전공)이 있음.
1933. 4. 일본 교토대학 타키가와 사건 발생.
1933. 4. 1. 박치우, 미야모토 카즈요시(宮本和吉) 교수 연구실 조수(2년 계약직)로 발령.
1933. 5. 10. 독일 베를린 분서사건.
1933. 9. 독일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던 안호상은 1932년 성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 미야모토 카즈요시(宮本和吉) 양 교수 지도 하에 1933년 9월 <논리학에 대한 변증법과 사색성>이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심사를 받고 있는 중이었음.
1934. 4. 1. 박치우, <위기의 철학>(『철학』 1권 2호, 철학연구회) 발표.
1934. 5.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 적화 공작사건.
1934. 9. 12. 박치우, 숭실전문학교(평양) 교수로 부임.
1934. 9. 19. 박치우, 경성제대 연구실 조수 사직.
1935. 1. 11. 박치우, <나의 인생관: 인간철학 서상>(『동아일보』)으로 민간 학술 영역에 첫 등장.
1935. 5. 30. 카프 해체(카프 서기장 임화).
1935. 6. 21. 프랑스 파리에서 21일부터 25일까지 문화옹호 국제작가회의 개최. 38개국에서 230명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회의 의장은 앙드레 지드. 그 밖에 로맹 롤랑, 하인리히 만, 토마스 만, 막심 고리키, 포스라 헉슬리, 버나드 쇼, 싱클레어 루이스, 셀마 라겔뢰프, 바르 잉클랑 등 12명이 참여했으며, 그들은 협회 본부를 파리에 두고 자국에는 서기국을 만들기로 함.
1935. 7. 25. 제3 인터내셔널 7차대회(모스크바) 개최.
1936. 2. 26. 도쿄에서 발생한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 2·26사건 발생.
1936. 봄. 박치우 모친 별세. 박치우, 김종숙과 결혼.
1936. 7. 17. 스페인 내전 시작.
1936. 8. 5. 미나미 지로 제7대 조선총독 부임(1936. 8. 5. ~ 1942. 5. 29.).
1936. 10. 25. 독일과 이탈리아, 추축국 결성.
1936. 11. 5. 일본, 독일과 방공 협정 체결.
1936. 12. 20.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시행.
1937. 7. 7. 일본, 중국을 침략하며 중일전쟁 시작.
1937. 10. 2. 조선총독부, 황국신민의 서사 제정.
1938. 3. 31.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전문학교 폐교. 박치우, 숭실전문학교 교수 사직.
1938. 4. 1. 박치우, 조선일보 사회부 및 학예부 기자 발령. 이원조, 김기림을 상관으로 모심.
1938. 1. 16. 일본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의 제1차 성명 발표.
1938. 2. 지원병제 실시.
1938. 3. 8. 조선총독부, 칙령 제103호로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 1938년 4월부터 조선어 상용 및 교육을 금지하고 일본어를 보급하는 황국신민 정책 시행.
1938. 4. 1. 일본은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인력과 물자 동원을 위해 법률 제55호로 <국가총동원법> 제정 공포. 조선에서는 5월 4일부터 시행.
1938. 7. 조선총독부,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족.
1938. 11. 3. 코노에 후미마로 일본 수상의 제2차 동아신질서 성명.
1938. 12. 14. 오후 6시 경성부민관 강당에서 좌담회 <시국유지원탁회의>(주제: 1. 내선일체의 구현화문제 2. 동아협동체의 건설문제 3. 국내혁신의 제 문제) 개최. 참석자: 이광수, 인정식, 갈홍기, 주요한, 이각종, 안준, 권충일, 차재정(사회), 조병옥, 현영섭, 차상달, 윤형식, 조두원, 유형기, 하경덕, 주련, 김동일.
1938. 12. 22. 코노에 후미마로 일본 수상의 제3차 동아신질서 성명.
1939. 1. 5. 제1차 코노에 내각 총사퇴.
1939. 4. 박치우 부친 박창영, 함북 온성군 훈계 교회 시무 중 별세.
1939. 8. 23. 소련과 독일의 상호불가침조약 체결.
1939. 9. 1. 새벽 4시 45분 독일의 폴란드 서쪽 국경 침공. 제2차 세계대전 개시.
1939. 9. 3. 영국과 프랑스, 독일에 선전포고함.
1939. 11. 10. 조선민사령 개정(제령 제19호와 제20호)으로 창씨개명 방침 발표(1940년 2월 11일 효력 발휘).
1940. 6. 22. 경성제대가 고대철학 연구를 위한 박치우의 대학원 입학을 허가함.
1940. 7. 22. 제2차 코노에 내각 성립. 신체제 운동 전개.
1940. 8. 10. 조선일보 폐간. 박치우, 조선일보 퇴직. 퇴직금으로 천원을 받음.
1940. 9. 27 독일, 이탈리아, 일본 삼국군사동맹 체결.
1940. 10. 조선총독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칭.
1941. 3. 1.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조선총독부령 제48호) 제정 및 시행.
1941. 3. 31. 조선교육령 개정(조선어 교육 완전 폐지).
1941. 4. 13. 일소 중립조약 체결.
1941. 6. 22. 독일의 소련 침략.
1941. 7. 3. 스탈린, 제2차세계대전을 파시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십자군 전쟁이라 규정.
1941. 12. 7. 일본의 진주만 공격. 히틀러의 미국 선전포고.
1942. 6. 이 시절 박치우는 조광사(1941년 6월 13일 설립, 대표 방응모, 인쇄업) 감사로 재직 중이었음.
1942. 12. 의무교육제도 시행 발표(1944년부터 시행할 징병제의 기반 조성).
1943. 1. 25. 박치우, <아리스토텔레스의 산문론(アリストテレスの散文論)>(『학총』 제1집 동도서적주식회사.) 발표.
1943. 2. 1943년 2월 <내가 꿈꾸는 신무기> 설문에 응답한 것을 마지막으로 박치우는 절필하고 만주로 떠남.
1943. 4. 1. 제4차 조선교육령 개정 시행.
1943. 11. 27. 미·영·중 연합국의 카이로 선언.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 여기서 조선의 독립을 최초로 보장.
1944. 8. 10. 여운형, <조선건국동맹> 비밀리에 결성.
1945. 5. 조선총독부, 전시교육령 공포.
1945. 6. 26. <국제연합헌장> 발표.
1945. 5. 7. 독일 항복.
1945. 7. 26.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중화민국, 소련의 포츠담 선언. 이 회담에서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처리 문제 논의.
1945. 8. 2. 소련 참전 선언.
1945. 8. 6. 미국,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1945. 8. 8. 박치우, 북경에서 단파방송으로 일제가 무조건 항복할 것을 알았음. 소련군, 만주와 한반도 북부 점령.
1945. 8. 10. 박치우, 일본 정부 수뇌부가 어전회의에서 무조건 항복 결정했다는 뉴스 청취.
1945. 8. 11. 박치우, 11일 아침 천진으로 출발하고 12일 천진을 떠나 15일 오후 창춘(新京)에 도착하여 해방을 맞이했음. 미국 3부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 Dunn)은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함. 이에 미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대령(이후 주한미군사령관 역임)과 미 육군 장군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중령(이후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은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음.
1945. 8. 15. 박치우, 창춘에서 조선의 해방을 맞이함. 창춘 시내 각처에서 시가전이 벌어져 상당한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고, 재류동포들을 모아 민단을 조직함과 동시에 중국 국민당 지하조직체와 연락하여 “조선민족과 중국민족은 조금도 충돌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이번 종전으로서 한층 더 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의 삐라와 포스터를 국민당의 이름으로 찍어 트럭에 실어 가지고 중국인 시가에 뿌리고 중국인을 상대로 가두연설도 하여 무용의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했음.
1945. 8. 16. 박치우, <조선학술원&glt;(8월 16일 결성) 산하 실무진으로 선임됨.
1945 8. 18. 박치우,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1945년 8월 18일 결성) 산하 <조선문학건설본부> 평론부 위원으로 선임됨. 이원조가 <조선문학건설본부> 서기장 및 평론부 위원장을 맡았고, 박치우는 서인식, 조윤제와 함께 평론부 위원으로 선임됨.
1945. 8. 20.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 결성.
1945. 9. 6. <조선인민공화국> 건국 선포. 이승만을 주석으로, 김구를 내정부장으로 내정.
1945. 9. 7. 김성수, 송진우, 서상일 등 동아일보사 계열 인사들은 <국민대회준비위원회>(위원장 송진우)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을 계획.
1945. 9. 8. 미군, 인천 상륙. 윤보선의 집 안동장에서 ‘인민공화국 타도하자’라는 선언문 채택과 함께 <한국민주당> 정식 창당. 9월 16일 창당대회 개최.
1945. 9. 12. 장안파 공산당을 흡수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1945. 10. 10. 미군정, 군정청 법령 제21호(일제 강점기 법률체계 계승) 공포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해체를 명령함.
1945. 10. 16. 이승만, 맥아더가 내준 항공기 편으로 환국.
1945. 10. 20.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당.
1945. 10. 25. 이승만, 정당 통일 목적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한민당, 국민당, 공산당 등 각 문화단체 대표 2백여 명 참석.
1945. 10. 박치우, 북한을 거쳐 10월 하순 귀국.
1945. 10. 30. 통일전선 결성을 둘러싸고 이승만과 박헌영이 첫 번째 회합을 가짐.
1945. 11. 4. <독촉중앙협의회> 이승만, 연합국에 보내는 결의문 발송.
1945. 11. 8. 박치우, 『중앙신문』 <문화왕래> 소식에 “평론가 박치우씨 8월 15일 이후 신경(新京) 거류민단 대표위원으로 활약하던 바 근일 귀경”으로 소개됨.
1945. 11. 10. 『중앙신문』에서 박치우를 ‘임시정부 영수 환국 전국환영회’(위원장 김석황) 보도부 위원으로 소개. <해방일보사>(『해방일보』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기자 자격으로 보도부 위원이 된 것 같음.
1945. 11. 7. 이승만, 인공 주석 취임을 공식 거부.
1945. 11. 16. 통일전선 결성을 둘러싸고 이승만과 박헌영의 두 번째 회합.
1945. 11. 21. 이승만,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 방송.
1945. 11. 23. <중경 임시정부> 요인 김구, 김규식, 이시영, 엄항섭, 유동열 등 1차 환국.
1945. 11. 27. 인공 측 허헌이 김구, 김규식을 방문하여 인공 중앙위원 취임을 요청함.
1945. 11. 30. 박헌영, 오후 7시부터 약 15분간 중앙방송국을 통하여 <진보적 민주주의 깃발 밑에서> 제목 아래 방송함.
1945. 12. 2. <중경 임시정부> 요인 홍진, 장건상, 성주식, 유림, 김성숙, 조소앙, 김원봉, 최동호, 신익희, 조완구 등 2차 환국.
1945. 12. 5. <조선공산당> 박헌영, 연합국에 보내는 메시지 발송. <조선공산당>은 이승만의 ‘덮어높고 뭉치자’는 무원칙 통일론 반대, ‘선 친일파제거 후 통일론’ 주장.
1945. 12. 13. <조선문학동맹> 결성. 박치우, 조선문학동맹 평론부(위원장 김태준) 위원이 됨.
1945. 12. 16. 미국, 영국, 소련은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함. 27일 조약문서 서명.
1945. 12. 17. 김일성을 <북조선로동당> 책임비서로 선출.
1945. 12. 21. 서울운동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전국 환영대회’ 개최.
1945. 12. 23. 조선공산당, 성명서 <통일방해자는 그대, 노(老)파시스트 이박사를 폭로함> 발표. 또, 조선공산당은 임정에 친일파 민족반역자, 국수주의자 등을 제외하고 좌·우익 반반의 수가 참여하는 통일원칙 제시. 임정 측은 조공의 통일원칙 거부.
1945. 12. 24. 조선공산당, <독촉>과 일체 관계를 파기한다는 성명서 발표.
1945. 12. 27. 조선과 소련 양국의 친선과 문화 교류와 발전을 위하여 각계 자연과학·인문과학·예술계·법조계·언론계를 망라한 대표 200여 명의 발기인이 참석하여 ‘조소(朝蘇)문화협회’(홍명희 회장 취임)를 창립. 신남철(경성제대 철학과 3회 졸업)이 개회사를 맡았고 박치우가 경과 보고를 맡았음. 샤브신(A. I. Shabshin) 소련 부영사가 특별내빈으로 참석.
1945. 12. 27. 『동아일보,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제목 아래 신탁통치 오보 기사 냄.
1945. 12. 28. 오전 6시(모스크바 시간)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 결정서 발표. 28일 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로서 신탁통치문제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간부 김일성 등과 논의하기 위해 평양 방문하고 12월 28일부터 1월 2일까지 체류함. 이 때 박치우도 김태준과 함께 박헌영과 동행함. 정태식이 <국내에 당면한 과업은 <파시즘> 근멸투쟁이다>라는 제목으로 박헌영의 원고를 하오 7시 15분에 대독 방송함.
1945. 12. 29. 중경 <임시정부> 세력은 반탁 결의문을 채택하고,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함.
1945. 12. 30. 김구의 <임시정부>, 국자(國字) 제1호를 발표하고 전 국민 파업과 철시 지시, 미군정에게 정권 이양을 요구하고 정부를 접수하려 함.
한국민주당 당수(수석총무) 송진우,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지지를 암시하였다는 이유로 새벽 6시 원서동 자택에서 괴한(한현우, 유근배)의 습격을 받고 암살당함.
1945. 12. 31. 박치우는 12월 31일 신탁통치 반대 강연에 백남운, 신남철 등과 함께 연사로 참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평양에 갔기 때문에 연사로 참여하지 못했을 수 있음.
좌익 40여 단체는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신탁통치 철폐를 위한 통일전선 결성’을 요구함. 31일 밤 <인민공화국> 대표 홍남표, 정백, 홍중식, 이강국 등과 <임시정부> 대표 최동오, 성주식, 장건상 등이 만남. <인민공화국> 측이 <임시정부> 측에 임정과 인공의 통일위원회 구성을 제의함. <임시정부> 대표들은 공문 발송 요청.
1946. 1. 1. <인민공화국>, 상오 9시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앞으로 보내는 통일위원회 구성을 제안하는 공문을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동호에게 넘김. 최동호, 공문 접수 서약서 씀. <임시정부>, 하오 6시 ‘서식상 접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공문 반송.
김구, 미군정청의 요청에 따라 복업을 요망하는 방송을 함.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우익세력의 공격에 대한 경고 성명 발표.
1946. 1. 2. 북한의 각 정당·사회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
1946. 1. 3. 박헌영이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조선공산당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 조선공산당,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서울시민대회’ 개최(약 50만 명 참가).
1946. 1. 4. 김구, 성명서 발표. 이 성명에서 각계·각당 대표가 참가하는 비상정치회의를 소집, 임정을 확대·강화한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헌법과 선거법을 만들어 국민대표대회를 소집, 정식 정권을 수립하자고 밝힘.
1946. 1. 7. >박치우, <탁치와 민족통일 – 혁명세력은 하나가 되라>(『중앙신문』 67-68호, 1946. 1. 7·8.) 발표. 인민당, 공산당, 국민당, 한민당 대표들의 4당 간담회 개최. 조선에 관한 모스코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합의.
1946. 1. 8. 4당 합의에 따라 ‘4당 코뮤니케’ 발표. 한민당, 국민당은 4당 코뮤니케 파기 성명서 발표. 군청청이 김구 세력의 <탁치반대 국민총동원회>와 이승만 세력의 <대한독립촉성중앙위원회>의 통합을 요청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결성됨. <대한민국 민주의원> 발족(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규식, 총리 김구).
1946. 1. 16. 서울 덕수궁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의 개최. 정태식이 밤 7시 15분부터 20분간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삼상회의의 조선에 대한 결정을 지지하자’는 제목의 박헌영 원고를 대독 방송함.
1946. 1. 18. 미군, 학병동맹사무소 습격,간부 3명 사살, 33명 검거 투옥. 학병동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해산 명령.
1946. 1. 19. 좌익 29개 단체, <민주주의민족전선> 발기준비위원회 개최
1946. 1. 20. 김구 계열, 20일 21일 이틀에 걸쳐 경교장에서 비상정치회의주비회 개최. 김원봉(신한민족당), 성주식(조선민족혁명당), 김성숙(조선민족해방동맹) 등은 탈퇴함.
1946. 1. 31. 박치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준비위원으로 1차 회의 참석.
1946. 2. 1. 김구 계열과 이승만 계열의 합세로 서울 명동 성당에서 <비상국민회의> 개최. ‘최고정무위원회’ 구성을 결정하고(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 김규식 선출) 그 인선을 이승만과 김구에게 일임.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준비위원회, 2월 1일 8개항의 <민전선언> 발표. 선언 2항에서 “민전은 조선인민의 총투표로써 선거될 인민대표대회가 구성될 때까지 과도적 임시국회의 역할을 할 것이며 임시적인 민주주의정부 수립의 책임을 자부함”이라고 그 성격과 역할을 명시함.
1946. 2. 3. 박치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준비위원회 사무국 선전부원 됨.
1946. 2. 8. 박치우,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 참석하여 특별보고 <국수주의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를 발표함. 박치우의 특별보고는 이원조의 제안으로 긴급동의에 부쳐져 참가자들에 의해 결의안이 채택되었음. <조선문학동맹>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개칭. 박치우, <조선문학가동맹> 가입.
1946. 2. 14.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의 개칭) 개최. 민주의원은 하지의 자문기관으로서 과도정부를 촉진시키는 사명을 갖게 됨.
1946. 2. 15. 박치우, YMCA 회관에서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공동 의장 여운형, 허헌, 박헌영, 김원봉)에 <조선문화협의회> 대표 자격으로 출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됨.
1946. 2. 20. 미군정청, 군정청법령 제55호(<정당등록법>) 공포.
1946. 2. 21. 박치우, <민주주의민족전선> 교육문화대책 연구위원에 선정.
1946. 2. 24.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결성대회 개최.
1946. 3. 5. 박치우, 춘천에서 개최된 제5회 문예강연회에서 <민주주의의 철학적 해명> 발표.
1946. 3. 20. 서울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소련측 수석대표 스티코프 중장, 미국측 수석대표 아놀드 소장) 개최.
1946. 3. 25. 『현대일보』 창간. 박치우, 발행인·주필 맡음. 『현대일보』는 문단과 평론계 중진들 사이에서 발간을 준비했고, ‘자유조선의 소리’, ‘세계민주주의의 전령’, ‘새 나라 건설의 전령’을 슬로건으로 내세웠으며, 청년 학도를 독자로 발행된 신문이었음. 현대일보사는 주간에 소설가 이태준(李泰俊), 편집장에 시인 김기림(金起林)(나중에 이원조가 편집장을 맡고 김기림은 고문을 맡게 됨), 외보책임자에 김영건(金永健)을 기용했음.
1946. 4. 3. 박치우, 박헌영의 평양 방문 2차 동행(1946. 4. 3 ~ 4.)
1946. 4. 15. 박치우,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주최로 산하 22개 문화학술단체를 총동원한, 4월 15일부터 5일간 열린 <민족문화건설 전국회의> 첫째 날에 문화 일반에 관한 보고의 일환으로 <민족문화와 세계관>을 발표함.
1946. 4. 17. <조선공산당> 창건 21주년 기념식.
1946. 5. 6. <미·소 공동위원회>(미국 측 수석대표 아놀드 소장, 소련 측 수석대표) 제1차 회의 무기 휴회 발표.
1946. 6. 23. 서울의 소련 영사관 폐쇄.
1946. 5. 18. 미군정청, 위조지폐 사건을 빌미로 정판사 빌딩 폐쇄. 『해방일보』 무기 정간 처분.
1946. 6. 3. 이승만, 전북 정읍에서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이라고 발언함.
1946. 6. 9. 미군정청, <국립종합대학안> 발표. 그 후 대규모의 국대안 반대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3개 대학이 폐쇄되고 380명의 대학 교수가 파면되었으며 5763명의 학생이 제적 처분을 받았고 570명에 이르는 교수, 학생이 검거, 투옥되었으며, 학생 1명이 죽었음.
1946. 6. 20. 박치우, <조선문학신인회> 결성에 참여.
1946. 6. 26. 혜화전문학교가 1946년 9월 신학기부터 동국대학으로 개칭하고 학생 모집을 위해 강좌와 교수를 소개하는 신문 광고(『중앙신문』, 1946. 6. 26.)를 냄. 박치우는 철학개론 강좌를 맡기로 되어 있었음.
1946. 6. 27. 박치우, 박헌영의 평양 방문 3차 동행(6. 27. ~ 7. 12.).
1946. 7. 13. 서북청년회 소속 20여 명의 청년들이 현대일보사를 방문하여 박치우에게 상해를 가함. 7월 11일자 기고 단평인 김명희의 <지방열을 타파하자!>라는 글이 우익을 자극하였기 때문. 박치우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혹독한 테러를 당함. 김남천은 이때 박치우가 “불굴한 신념과 초탈한 면모”로 그 의연함을 보여주었다고 회고했음. 서북청년회 청년들은 곧 구속 수사를 받았지만 테러 사건이 아니라 단순 폭력 행위로 처리되어 석방됨. 장택상은 박치우의 고소가 있다면 폭력범으로 입건하겠다고만 밝힘. 현대일보사는 16일 서북청년단체 대표에게 사과문을 보내고 17일 문제의 기사를 취소함.
1946. 7. 20. 박치우, 7월 20일부터 1주일 간 <조선문학신인회> 신인문학 강좌 강사로 활동.
1946. 8. 1. 박치우, 민청 청년 반전(反戰) 대회에서 ‘반전과 문화’ 제목으로 강연함.
1946. 8. 28. <북조선로동당> 창당.
1946. 8. 29. 민주적 대중단체들(전평, 전농, 민청, 부총, 문련, 반팟쇼반일운동자구원회, 재일본조선인연맹, 협동조합연합회 등)이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동문제를 객관적 입장에서 검토하기 위해 문련 주최로 간담회 개최, 토의 결과 3당합동촉진위원회 구성. 3당합동촉진위원회는 박치우를 사무장으로 임명함. <북조선로동당> 창당.
1946. 8. 31. 남로당준비위원회 구성.
1946. 9. 3. 조선공산당, 하지 중장의 8월 31일 성명에 대한 성명서 발표.
1946. 9. 6. 미군 헌병들이 『현대일보』,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3사를 수사하고 기자 다수를 연행. 이때 이후로 박치우 잠적함.
1946. 9. 7. 조선주둔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태평양 점령군사령부 포고령 제2호에 따라 주한미군의 안전을 위태롭게 했다는 사유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 이단하, 이강국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림. 미군정은 이들과 관계되어 있다고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에 대해서도 무기한 정간 처분을 내림. 『현대일보』 정간 사유는 구체적으로 『현대일보』 제165호 9월 6일자 2면에 <하 중장 성명에 대하여 (상)―조공 중앙위원회 서기국 성명>(9월 3일 조선공산당의 성명서)을 실었다는 것이었음. 박치우는 책임자로서 법정에 소환됐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잠적함. 미군정은 『현대일보』의 소유자인 박치우의 부재를 이유로 판권을 박탈하고 이듬해 우익계열 <대한독립 청년단>의 서상천에게 발행을 맡김. 추후 군사법정은 『조선인민보』의 정우순, 『중앙신문』의 이상호·황대벽 기자에게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함.
1946. 9. 23. 철도노동자, <남조선철도종업원 대우개선투쟁위원회> 조직하여 파업 개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9월 24일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 조직.
1946. 10. 10월 대구 인민항쟁.
1946. 10. 4. 여운형, 우측 대표 5인과 단독으로 좌우합작 7원칙 공동서명.
1946. 10. 7. 좌우합작위원회, 좌우 합작 7원칙 발표. 좌우 합작은 민전(장건상, 박건웅)과 민주의원의 대표들 간의 접촉으로 시작되고 7원칙 발표와 함께 사실상 끝난 셈.
1947. 10. 15. 사회노동당준비위원회 발족.
1946. 11. 20. 백양당(白楊堂)에서 박치우의 평론집 『사상과 현실』 발행. 1947년 4월 10일에 재판 발행.
1946. 11. 23. 3당 합동을 통한 남로당 결성.
1946. 12. 4. 여운형, 합작·합당 포기를 선언하고 정계은퇴를 표명한 <자기비판의 서> 발표.
1946. 12. 7. 백남운, 정계은퇴 성명서 발표.
1946. 12. 12.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개원.
1947. 박헌영은 1947년 초 서울 및 남한과의 연락을 위한 전초기지로 황해도 해주에 지도부를 설치. 이때 박치우는 남로당 간부 박승원, 문학가 이원조, 임화, 김태준, 이태준, 문용식 등과 함께 실무자로 활동을 시작했음. 부대시설로서 인쇄소와 출판사, 상사 등을 북측으로부터 제공받았는데, 북로당 황해도당이 사용하던 제일인쇄소(삼일출판사)를 거점으로 활용. 제일인쇄소에서 『인민의 벗』, 『민주조선』, 『인민조선』, 『노력자』 등 각종 선전물을 만들어서 서울로 보냈음.
1947. 3. 1. 민전, ‘3·1운동’ 기념 시민대회(서울 남산공원) 개최. 우익 진영, ‘기미선언기념 전국대회’(서울운동장) 개최. 좌우 투석전으로 16명 사망.
1947. 3. 12. 트루만 미국 대통령, 트루만 봉쇄독트린 발표. 반소반공정책 강화.
1947. 3. 22. 3·22 총파업. 50만의 조직 노동자, 17만의 농민, 8만의 시민·학생이 참가하여 가두 시위.
1947. 5. 8. 백남운, 정치 활동 재개.
1947. 5. 21.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 미국측 수석대표는 브라운 소장, 소련측 수석대표는 스티코프 중장.
1947. 5. 24. 여운형, <근로인민당> 결성.
1947. 6. 5. 미국 대통령 트루만, 마샬플랜 발표.
1947. 7. 19. 여운형, 극우파 청년 한지근에게 암살당함. 좌우합작 운동 사실상 붕괴.
1947. 7. 27. 남로당, 미·소공위 경축 임시정부수립 촉진 인민대회 개최. 서울 남산공원에 50만 명의 시민이 참가.
1947. 8. 상순. 미군정, ‘8·15기념대회’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좌익에 대한 대규모 탄압과 수천 명의 요인 검거 착수.
1947. 9. 17. 미국은 한국의 독립에 관한 모든 문제를 국제연합(UN) 제2차 총회에 제의함.
1947. 9. 26. 서울에서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 개최.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수석대표 스티코프 중장은 미·소 양군 동시철수를 제안함.
1947. 10. 18. <미·소 공동위원회>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은 국제연합 총회에서 한국 문제를 심의할 동안 미·소공동위원회 휴회를 제안함.
1947. 10. 박치우, 박헌영이 설립한 정치·군사학교의 성격을 가진 당간부 양성소 〈강동정치학윈> 정치부·교무부 주임(부원장) 맡음. <강동정치학원>은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면 입석리 대성탄광 합숙소 자리에 위치.
1947. 11. 14. <국제연합(UN)>은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미국 측 제안을 가결.
1948. 1. 1. <강동정치학원> 개원. 북로당 정치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소련 공산당원이었던 표드르 박(본명 박병률)이 원장을 맡았으며, 군사부의 주임(부원장)은 의용군 출신의 박모였고 부주임은 빨치산 출신의 서철이었으며, 박치우는 교무부·정치부 주임(부원장)을 맡았음.
1948. 1. 8.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회>, 서울 도착. 북한 인민위원회와 소련은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회의 북한 방문을 거부함.
1948. 2. 7. <남로당>은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회>의 목표가 남한 단독선거 실시임을 명확하게 의식하자 2·7 구국투쟁을 조직하여 남로당의 조직력을 과시함. 이를 계기로 좌익 세력에 대한 대규모 검거와 투옥의 회오리 바람이 붐. 남로당은 당 조직의 붕괴를 막기 위해 ‘입산 부대’(야산대라고도 했음)의 유격투쟁을 조직하게 됨.
1948. 2. 16. <국제연합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안’, 즉 남한만의 단독선거안을 가결시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완전 와해.
1948. 3. 25. 북한,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제안.
1948. 4. 3. 제주 4·3 항쟁 발생.
1948. 4. 19. 북한,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또는 <남북 연석회의> 개최.
1948. 4. 30.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명의로 공동성명서 발표.
1948. 5. 10. 남한 단독 선거 실시.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 8. 23.~25.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개최. 이때 박치우는 서기국원으로 활동.
1948. 8. 2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실시.
1949. 6. 26. 백범 김구, 서울 경교장 서재에서 군인 출신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함.
1949. 7. 전남 남원에서 토벌대에 의해 김태준 체포됨.
1949. 9. 6. 박치우는 9월 총봉기를 위해 이호제(고려대학 31회 졸업, 남조선 민청 위원장 역임)가 지휘하는 강동정치학원 출신 제1병단 5개 중대 360명과 함께 인민유격대 정치위원으로서 태백산 지구를 통해 남하함. 먼저 침투했던 제3병단의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2개월간 국군과 대치.
1949. 11. 김태준, 수색 근처에서 사형당함.
1949. 12. 4. 『동아일보』와 『자유신문』 1946년 12월 4일자에 약 2주일 전 태백산 전투에서 박치우를 사살했다는 기사 보도. 박치우는 제3병단의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태백산 지구에서 전투를 벌이다 국군과 경찰의 토벌대에 의해 사살됨. 박치우는 11월 20일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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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복제방지락(DRM)을 책에 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래처럼 파일 이름을, 또 저장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사법계와 일제 잔독 (박치우, 『사상과 현실』 제3부 수록)

사법계와 일제 잔독 (박치우, 『사상과 현실』 제3부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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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법계와 일제 잔독

치안유지법이 아직도 유효라고 얼토당토않은 사람을 잡아가고 백 배의 폭리라서 가두었던 사람이 죄 될 것이 없다고 불기소 처분이 되며 호텔 감방으로 세도(勢道)를 과시하던 천하(天下) 주지(周知)의 모리장자(謀利長者)가 구형을 비웃는 듯이 무죄 언도를 받는 등 대체 요즘의 사법계는 어떻게 된 셈판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통념은 이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법을 다루는 관계 인사들이 인간으로서의 인격에 있어 해방 때문에 갑자기 의심받을 정도로 양심의 질이 저하되었기 때문이라고는 보고 싶지 않다.

특히 사법관계의 인사들은 높은 교양과 꿋꿋한 의사와 흔들릴 줄 모르는 양심의 소유자임이 절대의 조건이 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다. 이렇던 사람들이 8·15를 경계로 하여 갑자기 양심이 흐려졌다든지 인격이 저하되었다고는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다면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 아닐까? 그렇다. 확실히 통념과 법 운용과의 상극의 원인은 다른 데 있어야 할 것이다. 하다면 그 소위 정말 원인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이것을 일부 사법 관계 인사들의 머리 속에 아직도 깊이 박혀 있는 일제식 사고의 잔재|211|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싶은 것이다. 이전 같으면 당연히 잡아 가두어야 될 일인데, 이 같은 생각이 남아 있길래 치유법243) 위반자가 붙들려 가는 것이며, 이전 같으면 이처럼 유력한 인물을 그 정도의 일로써 죄(罪)줄 수는 없는데, 이런 관념이 아직도 어딘지 남아 있길래 가두었던 사람도 내어놓게 되는 것이며 구형이 잘못이고 무죄가 정당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은 실상인즉 중요한 것은 이 ‘이전(以前)’일 것이다. ‘이전’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제 시절’이 아니고 무엇이냐.

우리는 이 기회에 사법계 제군에게 충심으로 일대 반성을 촉하고 싶다. 제군 중에는 과연 그 유창하던 일어를, 그 서투른 조선어로 바꾸었다는 것만으로써 해방조선의 검사나 판사나 변호사로서 충분하다고나 생각하는244) 자는 없는가? 민주조선, 주권이 인민에게 있어야 할 인민의 나라 조선에서, 인민을 위해서 법을 운영할 자격은 그 정도로써 넉넉하다고나 생각하는 자는 과연 없는가? 8월 15일은 단순히 8월 14일의 다음 날에 불과한 연속체의 한 토막으로밖엔 볼 줄 모른 자는 없는가? 이 전연 절연(截然)히 구별되어야 할 역사의 분기점을 그렇게 간단히 넘겨서 좋은 것으로 망상하고 있는 자는 없는가? 더구나 새 세상에서는 마땅히 거꾸로 피고일 자가 아직도 태연히 논고나 판결을 내리는 자리에 앉아 있는 자는 없는가? 있다면 단(單)히 당(當)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진실로 조선을 위해서 불행도 이에서 더 큰 자는 없을 것이며, 또 이보다 더 두렵고 몸|212|서리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상대가 ‘법’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법계가 자진해서 자체 내의 독소를 소탕하지 못한다면 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이오 또 이렇게만 되는 날이면 인민은 그때에는 일제히 일어서서 자기네 손으로 재판자를 재판에 부칠 것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일두조체(日頭朝體)245)의 암송구배(暗誦具輩)246)나, 조선이 누구의 나라인 줄도 모르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은 ‘철’을 모르는 타성분자들은 이 기회에 모름지기 조선제 대화숙(大和塾)247)에 들어가서 맹렬한 ‘미소기’248)를 받음으로써 정신을 버쩍 차려야 할 일이다. 사법계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체 내의 독소를 배제해야 할 것이다.

출전: 박치우, 『사상과 현실』 제3부 수록



박치우 『사상과 현실』 판매 이벤트 연장에 대해서

“박치우 <사상과 현실> 오늘(30일)만 판매합니다”를 일단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원래 30일 8시까지만 이벤트 판매하려고 했습니다만, 이벤트 마감이 이루어진 후에 카톡 등으로도 주문자가 몰려 이벤트 기일을 며칠 연장합니다. 마감을 언제할지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저녁에 알리겠습니다. 주문보다는 제게 걱정은 배송이 문제입니다. 락을 걸지 않아 개인정보를 책 속에 담아야 불법복제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수고스럽지만 이 방식을 택했는데, 시간이 걸려 주춤했습니다. 일단은 주문받습니다. 선착순 주문에 따라 선착순 배송합니다. 이메일 또는 핸드폰 문자메세지로 책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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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 생애 연보

한국 현대철학 제1세대의 거장 박치우의 저술 연보


부록 4

저술 연보

날짜 제목
1930. 3. <돌아가는 맹자(歸り行く孟子)>, 경성제국대학학우회 편, ≪청량≫ 제8호.
1934. 4. 1. <위기의 철학>. ≪철학≫ 1권 2호, 철학연구회.
1935. 1. 11. <나의 인생관: 인간철학 서상>(총 6회), ≪동아일보≫. 1935. 1. 11·12·15·16·17·18.
1935. 6. 12. <신시대의 전망(5) 인테리 문제: 불안의 정신과 ‘인테리’의 장래>(총 3회), ≪동아일보≫. 1935. 6. 12·13·14.
1935. 9. 3. <현대 철학과 ‘인간’ 문제 ― 특히 ‘르네상스’와의 관련에서>

(총 6회), ≪조선일보≫. 1935. 9. 3·4·6·8·10·11.

1935. 10. 2. <추등독서 ‘정독’과 ‘야독’>, ≪조선일보≫.
1935. 10. <한가한 되푸리>, ≪숭실활천≫ 제15권.
1935. 11. 3. <불안의 철학자 ‘하이덱겔’ 그 현대적 의의와 한계>(총 8회), ≪조선일보≫. 1935. 11. 3·5·6·7·8·9·10·12.
1936. 1. 1. <자유주의의 철학적 해명>

(총 4회), ≪조선일보≫. 1936. 1. 1·3·4·5.

1936. 1. <‘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 철학의 현실에 대한 책임 분담의 구명>, ≪조광≫ 2권 1호년, 조선일보사출판부.
1936. 1. <불안의식의 인성론적 설명>, ≪사해공론≫ 제2권 제1호, 사해공론사.
1936. 1. 15. <‘테오리아’와 ‘이슴’: 이데오로기로서의 철학의 양면>

(총 2회)(노고수 필명 사용), ≪동아일보≫. 1936. 1. 15·16.

1936. 5. <그 아내 그 남편: 나는 내 남편의 어느 점이 좋은가(김종숙) 나는 내 안해의 어느 점이 좋은가(박치우)>, ≪여성≫ 1권 2호 조선일보사출판부.
1936. 5. 28. <국제작가대회의 교훈, 문화실천에 있어서의 선의지>(총 4회), ≪동아일보≫. 1936. 5. 28·29·31, 6. 2.
1936. 7. <내가 그때 만약 의사였으면>, ≪사해공론≫ 제2권 제7호 사해공론사.
1936. 9. 4. <나의 관심사: 두 편의 노작>, ≪조선일보≫.
1937. 1. <세대 비판의 완성으로>, ≪조광≫ 3권 1호, 조선일보사출판부.
1937. 1. <세대 사관 비판(其一)>

, ≪신흥≫ 제9호.

1937. 1. 1·4. <고문화(古文化) 음미의 현대적 의의>

(총 2회), ≪조선일보≫.

1937. 2. <문인과 여성, 문인과 부부>(설문), ≪여성≫ 제2권 제2호, 조선일보사출판부
1937. 3. <독서설문>, ≪조광≫, 조선일보사출판부
1937. 4. 24. <사교의 발호와 종교상업주의>

(총 4회), ≪조선일보≫. 1937. 4. 24·25·27·29.

1937. 6. <사상과 육체>, ≪조광≫ 3권 6호, 조선일보사출판부.
1938. 1. 1. <평론가와 작가의 일문일답: 박치우·이효석―지성옹호와 작가의 교양>, ≪조선일보≫.
1938. 1. <내 집의 화분: ‘탄일화’>, ≪조광≫ 제4권 제1호
1938. 5. 10. <현대학생풍기론―그 사회적 근거와 변천상>(총 5회), ≪조선일보≫. 1938. 5. 10·11·12·13·14.
1938. 6. 14. <고전부흥의 이론과 실제: 고전의 성격인 규범성―참된 전승과 개성의 창조력> ≪조선일보≫.
1938. 7. <문화조선에 기(寄)하는 서(書)―현대조선학생론>, ≪사해공론≫ 4권 7호년, 사해공론사.
1938. 7. <좌담회: 조선영화의 신출발>(출석자: 안석영, 방한준, 임화, 이창용, 서광로, 박치우, 이병일, 이금용, 본사측 기자), ≪조광≫ 8권 1호, 조선일보사출판부.
1938. 7. 23. <경량특급: 산으로 바다로. 해반 제3참 후포>(총 4회) (1) 오백호 미만 어촌에 사공이 8백여 명 호미를 이즌 “후리포”는 바다만 밋고 산다 (2) “고기떼가 오나 보자” “관어대(觀漁臺)” 설치코 감시―가장을 바다로 보내고 잠 못 자는 가족의 정경 (3) 포구에서 포구로! 후조(候鳥)와 가튼 “해녀선(海女船)”―해수(海獸)의 비명(悲鳴)인 듯 요기(妖氣)를 띈 휘파람소리 구슬퍼 (4) 대부망(大敷網) “후릿배”의 장쾌(壯快)한 양상출진(洋上出陣)―오늘 수획은 무엔고? 굼굼한 이곳 어촌의 비밀, ≪조선일보≫. 1938. 7. 23·24·26·27.
1938. 11. <예지로서의 지성>, ≪비판≫ 제6권 제11호.
1939. 2. 22. <전체주의의 제상(諸相): 전체주의의 철학적 해명―‘이즘’에서 ‘학’으로의 수립과정>, ≪조선일보≫. 1939. 2. 22·23·24.
1939. 4. 1. <졸업하는 여학생에게 ― 누이동생 순이에게 부치는 편지>, ≪여성≫ 제4권 제4호, 조선일보사출판부.
1939. 4. 14. <종교와 투자>, ≪조선일보≫.
1939. 5. 6. <구라파 문화는 어디로?: 형식논리의 패퇴―분유논리의 부활?>(총 2회), ≪조선일보≫. 1939. 5. 6·7.
1939. 8. 1. <하기방학 이용법, 남녀학생 풍기문제>(설문), ≪학우구락부≫ 제1권 제2호.
1939. 11. <교양의 현대적 의미: 불혹의 정신과 세계관>, ≪인문평론≫ 1권 2호, 인문사.
1939. 11. <좌담회: 여성과 독서>, ≪여성≫ 제4권 제11호, 조선일보사출판부.
1939. 11. 8. <한해지(旱害地) 실정과 그 구제책>(총 4회) (1) 인사(人事)는 진(盡)·대천명(待天命)―재지(災地) 농민들의 불사신적 노력!(2) 조직을 어든 정신력―농토를 수호하고 잇는 굳센 의기 (3) 방재(防災)는 인위로 가능―농경제도의 근본적 재검토 필요 (4) 무엇보담 과동책(過冬策)―학동퇴학을 기어코 붓드러라, ≪조선일보≫. 1939. 11. 8·9·10·11.
1939. 12. 15. <학계 1년 보고서. 조선학의 독무대>(총 2회). ≪조선일보≫. 1939. 12. 15·16.
1939. 12. <한해(旱害)칠도(七道)의 현지보고>, ≪농업조선≫ 제2권 제12호
1940. 1. <플라톤>, 방응모 ≪세계 명인전≫ 제3권, 조광사.
1940. 1. 4. <자력 갱생의 ‘호(好)표본’: 소학생 일요노동대―동병상련의 ‘명콤비’ 애꾸눈이와 꼽추>, ≪조선일보≫.
1940. 3. 15. <문화문제 종횡관: 평단삼인 정담회―서인식 박치우 김오성>(총 3회) (상) 문화성장의 토양, (중) 민족정서와 전통, (하) 문화수입의 태도, ≪조선일보≫. 1940. 3. 15·16·19.
1940. 4. <교양의 현대적 의미: 평론편> ≪조선작품연감≫ 15권, 인문사.
1940. 5. <지식인과 직업>

, ≪인문평론≫ 2권 5호년, 인문사.

1940. 7. <동아협동체론의 일성찰>, ≪인문평론≫ 2권 7호년, 인문사.
1940. 8. 10. <수상: 중얼기>, ≪조선일보≫.
1940. 11. <과학에의 돌격!―교육조선의 신 코쓰>(좌담회: 고공교수 안동혁, 성대병원 위생학교실 최희영, 성대병원 송정외과 문인주, 연전교수 한인석, 문예평론가 서인식, 사회평론가 박치우, 본사측 이갑섭)(좌담회 소주제: (1) 과학문명달성의 필요, (2) 향학의 실정과 문화과학에의 편중문제, (3) 시국과 과학교육, (4)과학지식의 대중화, (5)기술의 대중화문제, (6)조선에 특수한 연구제목, (7)연구소 설치의 급무), ≪조광≫ 6권 11호, 조선일보사출판부.
1941. 1. <전체주의의 논리적 기초>, ≪조광≫ 7권 1호, 조선일보사출판부.
1941. 4. <도시와 농촌의 문화교류: 농촌문화문제특집>, ≪조광≫ 제7권 4호, 조선일보사출판부.
1941. 6. <내가 밤을 새고 읽은 책>, ≪춘추≫ 제2권 제5호, 조선춘추사.
1942. 1. <좌담회: 조선영화의 신출발>, ≪조광≫ 제8권 제1호.
1943. 1. 25. <アリストテレスの散文論(아리스토텔레스의 산문론)> ≪학총≫ 제1집 동도서적주식회사.
1943. 2. <내가 꿈꾸는 신무기>, ≪조광≫ 제9권 제2호.
1946. 1. 7. <탁치와 민족통일―혁명세력은 하나가 되라>(총 2회), ≪중앙신문』 67―68호. 1946. 1. 7·8.
1946. 1. <연구와 발표의 자유>

, ≪대조≫ 제1권 1호년, 대조사.

1946. 2. 8. <국수주의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 특별보고 강연).
≪사상과 현실≫과 ≪건설기의 조선문학≫(1946년 6월 발행)에 재수록.

1946. 2. 26. <민족과 문화>

(총 4회), ≪한성일보≫. 1946. 2. 26, 3. 4·5·7.

1946. 3. 1·3. <3.1운동의 역사적 성격>, ≪조선인민보≫.
1946. 3. 25. <본보의 사명(1)―자유 조선의 소리>, ≪현대일보≫ 제1호 사설.
≪현대일보≫ 제1호 제2호 제3호 사설을 쓴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위상복은 박치우가 썼을 것이라 확신한다. 위상복의 견해에 따라 연보에 넣었다.
1946. 3. 26. <세계민주주의의 전령―본보의 사명(2)>, ≪현대일보≫ 제2호 사설.
1946. 3. 27. <새 나라 건설의 거울―본보의 사명(3)>, ≪현대일보≫ 제3호 사설.
1946. 4. 4. <학원을 좀먹는 일제 잔재>

: ≪현대일보≫ 제11호 사설.

1946. 4. 13. <국민의 대표>

: ≪현대일보≫ 제20호 사설.

1946. 4. 15. <민족문화와 세계관>

(민족문화 건설 전국회의 보고연설), ≪신천지≫ 제1권 제5호 수록.
이 보고연설은 ≪신천지≫ 제1권 제5호(1946. 6.)에 <민족문화 건설과 세계관>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고 ≪사상과 현실≫에도 <민족문화 건설과 세계관>이라는 제목으로 재수록됨.

1946. 4. 19. <문화공동체와 민족의 성립>

, ≪중외신보≫.

1946. 4. 21. <반민주주의에게는 자유가 없다>

, ≪현대일보≫ 제28호 사설.
≪사상과 현실≫에 <반민주주의자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제목으로 재수록함.

1946. 5.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 신생 조선의 민주주의를 위하야>

, ≪민고≫ 창간호 1권 1호.

1946. 5. 6. <사법계와 일제 잔독>

, ≪현대일보≫ 제42호 사설.

1946. 5. 22. <민주주의의 진짜와 가짜>

, ≪현대일보≫ 제58호 사설.

1946. 6. <건국동원과 지식계급(좌담회)>, ≪대조≫ 1권 2호, 대조사.
1946. 6. <민족문화 건설과 세계관>

, ≪신천지≫ 제1권 제5호, 서울신문사출판국.
1946년 4월 15일 <민족문화와 세계관>이라는 제목으로 <민족문화 건설 전국회의>에서 보고연설한 것임.

1946. 6.  <민주의원에>, ≪민성≫ 제2권 제7호, 고려문화사.(5월 11일 작성)
1946. 6. 1. <토지와 포기>

, ≪현대일보≫ 제68호.

1946. 6. 9. <여성해방과 여류정객>

, ≪현대일보≫ 제76호 사설.

1946. 6. 14. <반미론자가 없는 이유>

, ≪현대일보≫ 제81호 사설.
≪사상과 현실≫에 <조선에 반미론자가 없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재수록됨.

1946. 6. 15. <‘좌익’과 ‘우익’>

, ≪현대일보≫ 제82호 사설.

1946. 6. 16. <공로에는 훈장을>

, ≪현대일보≫ 제83호 사설.

1946. 6. 27. <‘큰 코 다친다’>, ≪현대일보≫ 제94호.
1946. 7. <1대1과 형식논리>

, ≪인민평론≫ 제1권 제2호.

1946. 7. <좌담회: 건국동원과 지식계급>(김기림, 박치우, 백철, 정근양), ≪대조≫ 제1권 제2호, 대조사.
1946. 7. 9. <학자, 교육가를 우대하라>

, ≪현대일보≫ 제106호 사설.
≪사상과 현실≫에는 <학자, 교육자의 성직문제>라는 제목으로 재수록됨.

1946. 7. 12. <학생은 시대에 앞서라>

, ≪현대일보≫ 제109호 사설.

1946. 7. 26. <상투>

, ≪현대일보≫ 제123호.

1946. 8. <사회 시사평론: 자유 홍수 미신>, ≪협동≫ 통권 제1호, 조선금융조합연합회.
1946. 8. 25. <민주주의의 철학적 해명>, 조선학술원 엮음, ≪학술―해방기념논문집≫ 제1집 창간호.
1946. 9. 3. <민주세력의 결집을 위하여(1)―지도자의 공복의식>, ≪현대일보≫ 제162호.
1946. 9. <조윤제·박치우 대담: 종합대학안 시비>, ≪민성≫ 제2권 10호, 고려문화사.
1946. 9. <제씨(諸氏): 국립서울대학안과 나의 견해>, ≪민성≫ 제2권 제10호, 고려문화사.
1946. 9. <임시정부의 성격은?>(설문 1. 국내정세로 보아 수립되야 할 정부의 성격 2. 국제정세로 보아 수립되고야 말 정부의 성격 3. 정부의 인원구성에 대한 귀하의 사견: 김오성 박치우 서강백 이북만 윤세중 한일대) ≪신세대≫ 제1권 제4호.
1946. 9. <아메리카의 문화>

, ≪신천지≫ 제1권 제8호, 서울신문사출판국.

1946. 11. 15. <민주주의와 인민>, 김계림 엮음, ≪민주주의 12강≫, 문우인서관. (1946년 2월 작성)
이 글은 앞서 ≪학술―해방기념논문집≫(조선학술원 엮음, 제1집 창간호, 1946. 8. 25.)에 실은 <민주주의의 철학적 해명>과 제목만 다를 뿐 내용은 동일한 글이다.
1946. 11. 20. ≪사상과 현실≫

, 백양당.(재판 47년 4월 10일 발행).
서평: 김남천, <변혁하는 철학, 박치우 저 ≪사상과 현실≫>, ≪독립신보≫ 제199호(1946. 12. 10) ; 박종홍, <붘 레뷰: 朴致祐 저, 사상과 현실>, ≪경향신문≫(1946. 12. 12) ; 신남철, <신간평 : 사상과 현실–보전되는 진공지대>, ≪서울신문≫(1946. 12. 17) ; 정진석, <서평: 박치우 저 ≪사상과 현실≫>(≪문학평론≫ 통권 제3호, 문학평론사, 1947. 4.).

1947. 2. <문학자의 정치관여>, ≪국학≫ 제2호.
≪사상과 현실≫ 원문 157쪽에 있는 “문학자가 제작은 …… 의무인 것이다” 한 단락을 인용한 것이다.
1947. 10.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관>, ≪신인문학≫ 1권 1호.
이 글은 박치우가 1946년 7월 20일부터 1주일 간 행한 ‘조선문학신인회’의 신인문학강좌의 내용을 실은 것이다.


박치우 『사상과 현실』 목차

일러두기
편집자 서문

사상과 현실

서(序)

목차

제1부
철학의 당파성 -테오리아와 이즘-
시민적 자유주의
지식인과 직업
고문화 재음미의 현대적 의의58)
사교의 발호와 종교상업주의
현대철학과 ‘인간’ 문제 -특히 ‘르네상스’와의 관련에서-
세대사관 비판

제2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신생 조선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1대1과 형식논리
민족과 문화
민족문화 건설과 세계관
국수주의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
연구와 발표의 자유
아메리카 문화

제3부 새 나라 건설을 위하여
▲ 상투
▲ 토지와 포기(抱妓)
▲ ‘서울’ 과신과 정당 편중
▲ 새 자유의 성격
▲ 반(反)민주주의자에게는 자유가 없다
▲ 학생은 시대에 앞서라
▲ 학자, 교육자의 성직 문제
▲ 학원을 좀먹는 일제 잔재
▲ 사법계와 일제 잔독
▲ 공로에는 훈장을
▲ 국민의 대표
▲ 민주주의의 진짜와 가짜
▲ ‘좌익’과 ‘우익’
▲ 조선에 반미론자가 없는 이유
▲ 여성 해방과 여류 정객

부록

부록1

박치우의 삶과 죽음

1. 박치우의 초상화
2. 박치우와 그의 가족
3. 경성제대 학창 시절
4. 숭실전문학교 교수 시절 : 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
5. 조선일보 기자 시절 : 지성과 파시즘 비판
6. 해방 공간(1) : 탁치와 민족통일
7. 해방 공간 (2) : 현대일보 주필 박치우
8. 강동정치학원과 순교자적 죽음

부록2

『사상과 현실』 해제

1. ≪사상과 현실≫의 역사적 의의
2. 출판 직후의 서평들
3. 출전과 구성체계
4. 제1부 해설
4.1 철학의 당파성 : 테오리아와 이즘
4.2 시민적 자유주의
4.3 지식인과 직업
4.4 고문화 음미의 현대적 의의
4.5 사교의 발호와 종교 상업주의
4.6 현대철학과 인간 문제
4.7 세대사관 비판
5. 제2부와 제3부 해설
5.1 국수주의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
5.2 부르주아 민주주의 비판과 근로인민 민주주의론
5.3 민족문화 건설론
5.4 학자와 국가의 관계
6. 해설을 마치면서 : ≪사상과 현실≫의 현재적 의미

부록3

생애 연보

부록4

저술 연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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